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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순대국밥에 얽힌 병천장의 추억

2011.08.05(금) 홍경석(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례적으로 고향의 죽마고우들을 만난다. 그중엔 나처럼 머리가 반이나 더 빠진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어떤 친구는 치아마저 헤벌쭉 넓게 벌어져 이건 영락없는 할아버지 모양새인 동무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만나면 우린 무조건 즐겁다. 그리곤 대책 없이 유년의 시절로 마구 회귀한다. 왜냐면 그들은 모두가 자그마치 50년지기(知己)이기에, 그래서 각자의 과거사까지를 모조리 줄줄이로 꿰고 있는 ‘도사’이기도 한 때문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장마가 겨우 사라져 피서의 행보에 탄력이 붙는 즈음이다. 그래서 말인데 만날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장마철엔 순대만한 정겨운 음식이 또 없다. 죽마고우들과 이따금 찾는 맛집의 순례(巡禮)엔 병천장과 병천의 명물인 ‘병천순대’가 빠지지 않는다.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5일장의 병천장은 예전부터 ‘병천 순대’로도 명성이 자자한 까닭이다. 그러나 과거의 그 병천장은 나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극명한 배고픔의 아픔을 안겨주기도 한 애증(愛憎)의 대상이기도 하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고향 바로 아랫집의 아저씨 한 분이 다리미 월부장사를 하셨다. 근데 하루는 병천장에 다리미를 파는데 같이 가자고 꼬드기셔서 같이 가게 되었다. “용돈을 푸짐하게 주마!”

그래서 얄팍한 내 등에 다리미 다섯 개를 짊어지고 따라나섰는데 하지만 땅거미가 자욱하게 몰려올 때까지도 아저씨는 공(空)을 치셨다. 그 바람에 배는 그야말로 등가죽에 가 붙을 지경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눈보라가 어찌나 앵돌아졌는지 마치 1.4후퇴 때 흥남부두서 ‘한국전쟁’이란 난(亂)을 피해 달아날 때 모양으로 그렇게 억세게 추웠다! 배고픔과 추위의 협공에 마구 와들와들 떨 무렵에야 겨우 내 앞에 오신 아저씨는 밤이 어둑해서야 겨우 다리미 한 대를 팔았다며 지척의 순댓집으로 가시어 내게도 순대국밥을 한 그릇 사 주셨다.

애잔했던 심신이었던 당시의 나는 그 순대국밥을 먹으며 자꾸만 어찌나 슬픔이 그리도 되새김되던지 하여간 그 아저씨 모르게 그게 국밥인지 아님 ‘눈물밥’인지 조차도 모르게 와락와락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어제 피서 차 수통골에 갔다가 ‘유성 5일장’을 보려고 들렀다. 그러다가 난장에 선 국밥집을 보자니 그 시절 병천장에서의 참으로 배고팠던 설움이 옹기종기로 다가왔다. 그러자 동시에 노스탤지어의 정서를 건드리면서까지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으로 시작되는 가수 현철의 ‘봉선화 연정’과도 같은 뭉게구름이 얼기설기로 소조(蕭條)하게 몰려왔다.

  눈물의 순대국밥에 얽힌 병천장의 추억 사진  
▲장날의 묘미와 어떤 압권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단연 먹는데 있다. 더욱이 쥔이 한 사발 퍼 주는 공짜의 막걸리는 장터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눈물의 순대국밥에 얽힌 병천장의 추억 사진  
▲‘동물농장’과도 같은 가축의 거래 모습은 예로부터 가축을 가족으로 여긴 우리네의 푸근한 정서를 덩달아 떠올리게 한다.
  눈물의 순대국밥에 얽힌 병천장의 추억 사진  
▲최신 패션은 장날에 만난다? -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도도한 여자가 한껏 자태를 뽐내며 행인들의 발길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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