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사는이야기

충남넷 미디어 > 사람세상 > 사는이야기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2009.12.22(화) 비자(kkt6119@hotmail.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평소같으면 무료한 주말을 보냈을 것을 왠지 오늘은 아침부터 밖을 돌아다니고 싶어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오면서 칠백의총에 들렸다. 학창시절때 봄소풍으로 방문했던 이후 처음이라 생각해보니 다시 방문하는데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칠백의총은 1963년에 사적 제105호로 지정되었으며, 충남 금산군 금성면(錦城面) 의총리 소재. 면적 7만 5240 m2. 1592년(선조 25) 8월 18일의 제2차 금산싸움에서 조헌 ·승장(僧將) 영규(靈圭) ·참봉 이광륜(李光輪) ·만호 변계온(邊繼溫) 등 700의사가 장렬한 전사를 하자 조헌의 문인(門人)인 박정량(朴廷亮) 등이 이 곳에 유골을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칠백의총 안내도

들어가기 전 입구 옆에 안내도가 눈에 들어왔다.  여지껏 칠백의총을 방문했을때 한번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기억에 맘먹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칠백의총 안내문

 안내도와 안내문을 한번 훑어본 후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칠백의총 입구

사진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사진 좌측에 매표소가 있다. 학창시절때 무료로 관람한 기억에 그냥 입구로 들어가려다 혼났다... 현재 대인은 500원씩 요금을 받고 있었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의총문 가는길

안내도를 한번 훑고 들어와서 멀리 보이는 문이 의총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좌측에 관리사무소를 지나 좀 더 다가가 의총문을 만날 수 있었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의총문의 전경

칠백의총 정문에서 종용사로 들어서는 도중에 만나는 첫 문으로 칠백 의총의 외삼문(外三門)에 해당한다. 의총문(義塚門)은 1971년에 실시된 제1차 정화 공사 때 새로 지어진 것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지붕은 맞배 지붕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어졌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의총문을 지나 오른쪽에 위치한 순의비각과 비문의 내용을 새로 옮겨새긴 석조물

중봉(重峰) 조헌(趙憲) 선생 일군(一軍) 순의비(殉義碑)는 1603년 계묘년(癸卯年)에 칠백 의총 묘역에 세워졌다. 이 비는 송방조가 공신 윤근수에게 비문을 의뢰하여 썼으며, 글씨는 조송설(趙松雪) 체를 잘 쓰던 김현성이 맡아 완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금산경찰서장 “이시까와 미찌오 石川道夫”에 의해 비가 폭파(爆破)되었던 것을 주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하여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8.15 광복 이후 파내어 보관하여 오던 중 1971년 경역 확장시 그 파손된 비를 붙여서 비각을 새로 새우고 영구히 보관하게 되었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의총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한 기념관의 모습

순의비각을 둘러본 후 취의문으로 올라가기 전에 잠시 기념관에 들렸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국방강화상소도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금산전투의 모습

내부에는 의병활동 기록화와 중봉 조헌 선생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6종 7점이 보물 제1007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직원분이 알려주셨다. 설명을 들으면서 무심코 셔터를 누르고 있는 저에게 직원분께서 실내에서는 촬영금지라고 말씀하셨다. 직원분에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도망치듯 기념관을 나오면서 아까 매표소사건도 생각이나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기념관에서 조금만 걸으니 취의문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취의문의 전경

칠백의총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는 문으로 의총문과 종용사 사이에 위치해 있고 의총문과 마찬가지로 1971년에 실시된 제1차 정화 공사 때 새로 지어졌다. 이 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솟을 대문으로 철근 콘크리트조 맞배 지붕 초익공 건물로써 의를 취해 궐기한 의병의 정신을 담은 이름이라고 한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사당인 종용사의 모습

1647년(인조 25) 종용사(從容祠)를 건립하여 700의사의 신위(神位)를 모셨지만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일제가 그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파괴한 것을 1963년에 정화작업을 하면서 묘역을 넓히고, 1968년에는 종용사를 다시 지어 묘역을 조경(造景)한 후 사적으로 지정했다. 이런 종용사는 조헌선생, 영규대사, 제봉 고경명 장군과 그 휘하의 막졸들을 모시고 있는 칠백 의총의 사당으로써 원래 칠백 의총 언덕 밑에 목조 건물로 전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였고 그 앞에 삼문이 있었다고 한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종용사 뒤 언덕에 위치한 칠백의총

 종용사를 자세히 둘러본 후 옆 계단을 따라 오르니 칠백의총 묘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총은 봉분 밑 부분에는 판석을 둘러 흙이 흘러 내려오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그 주위 바닥에는 봉분을 따라 다시 돌을 깔았다. 분묘 앞에는 상석(床石)을 설치하였고 분묘 주위로 담장을 둘렀다. 묘역앞에서 서서 잠시 선조들의 충절에 묵념을한 후 분묘주위를 한번 돌아보았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칠백의총 옆에 있는 순의비

입구에서부터 의총까지 관람하는 동안 나말고 관람객이 한명도 없어 내가 걸을때마다 눈을 밟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정도로 고요해 순의비 내용을 읽는 동안 잠시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관람시간이 다 되어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아까 매표소 직원분께서 동절기(11월~2월)에는 관람시간이 한시간 준다고 귓뜸해주신 것도 생각이나 좀 일찍 관람을 끝마치고 마지막으로 묘역에서 칠백의총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700의사의 충혼 잠든 '금산 칠백의총' 사진  
▲ 언덕에서 바라본 종용사와 취의문

칠백의총은 조헌선생과 승장 영규대사가 이끄는 칠백의사의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있는 성스러운 곳으로 민족의 빛나는 호국정신의 성역이며 거룩한 제단이다. 한해를 마무리 짓는 지금 가족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문화재에 들려 선조들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것도 자라는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될 것이다.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