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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세월 간직한 ‘예산 신암양조장’의 ‘신암생막걸리’

충청의 재발견, 100년 술도가 전통의 향기를 빚다

2024.07.23(화) 06:47:10 | 홍주신문 (이메일주소:rlarudal4767@daum.net
               	rlarudal476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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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신암면 종경리 29-2(종경길 45)에 위치한 신암양조장. 예산군은 1926년에 설립된 가치에 주목, 충남도에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양조장의 개념이 자리잡기 전, 주로 막걸리 등 소규모 가내주조 즉 가양주형태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양조장은 1916년 주세령과 함께 등장했다. 이때 주세의 대상이 된 가양주는 높은 세금으로 인해 서서히 사라졌다. 1934년 가양주 면허제도가 폐지되면서 1995년까지 60여 년간 막걸리의 제조는 양조장에서 이뤄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1963년 박정희 정부는 부족한 양곡을 보충하기 위해 쌀소비 억제정책의 일환으로 막걸리 제조에 쌀 사용을 전면금지시킨다. 이로 인해 밀이나 고구마를 이용한 막걸리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쌀에 비해 맛과 품질이 떨어져 인기를 얻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막걸리처럼 저렴했던 소주가 흥행하기 시작했다. 이러던 중 새마을운동의 성과로 쌀이 풍족해지자 다시 쌀막걸리 정책으로 바꾼다. 이것도 잠시 1979년 다시 쌀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서 정부는 막걸리의 주재료를 쌀뿐만 아니라 밀과 고구마를 섞어 만들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양조장에서는 원가 절감을 위해 쌀 대신 밀가루만 사용해 만들기 시작했고, 1989년 이후 다시 쌀막걸리 제조가 허용됐다. 이때부터 막걸리가 대중 속에 스며들게 됐고, 각종 행사 등에 등장하면서 ‘막걸리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르신들을 위한 신암양조장의 쉼터.
어르신들을 위한 신암양조장의 쉼터.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속주 막걸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은 단연 막걸리와 소주를 꼽는다. 특히 1970년대에는 전체 술 생산량과 소비량의 3분의 2가 막걸리였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농촌은 물론이고 도시 사람들도 막걸리를 즐겨 마셨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속주인 막걸리는 ‘막(금방) 걸러낸 술’이라는 뜻으로, 또는 탁한 술이라고 해서 ‘탁주’라고도 불렸으며, 농삿일을  할 때에는 힘을 돋워 주는 ‘농주’요, 곡식으로 빚은 술이라 ‘곡주’이며, 술맛이 연하고 술기운이 박하다 해 ‘박주’이고, 흰 술이라 해서 ‘백주’로도 불렸다. 

그러나 막걸리는 1974년 최고의 출고량을 기록한 이후 조금씩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89년 맥주에 출고량이 역전당해 우리나라의 대중주(大衆酒)의 위상을 맥주에 넘겨주게 된다. 지금은 최대 출고량을 자랑했던 1974년의 10분의 1 정도가 출고되는 수준이라고 한다. 하나둘 막걸리 양조장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아감에 따라 양조장과 함께했던 추억들도 이제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100년 가까운 양조장의 역사를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가양주 문화는 일제강점기 주세법이 공포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집에서 술 빚는 것이 금지되면서 자연스럽게 집에서의 술 제조법의 전수도 끊겼다. 밀주라는 것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여유를 가지고 만드는 술이 아니었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속성 제조법들만 넘쳐나면서 제대로 된 술빚기는 할 수 없었다. 결국 제대로 된 술 제조법의 전수도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반면 조선총독부에서는 기업화된 양조장에서 확실한 세금징수를 위해 양조장을 대상으로 효율적인 술 빚기 교육을 하기도 했다. 이 교육이 바로 ‘주조강습회’이다. 주조기술자들의 기초지식 함양과 좋은 술 제조를 위하고 제조 수득률을 높일 목적으로 조선주조협회중앙회가 주관하고 장소와 강의는 총독부 주류시험실에서 담당해 주조기술 강습회를 매년 실시했던 것이다. 보통 강습생 15명 내외를 모집해 양조에 관한 학과와 실습을 3주간 정도로 실시하기도 했다. 제1회 조선주조강습회는 1935년 5월 20일부터 6월 5일까지 17일간 교육을 실시했다. 교육내용은 이화학개요, 양조분석법, 원료와 원료처리, 밑술, 술덧, 설비, 기계기구, 경제개요 등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조강습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역의 주조협회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실례로 1924년 4월 19일 자 ‘매일신보’에는 “인천양조강습회가 대장성양조시험소 기사를 초빙하여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인천공회당에서 양조 강습회를 개최한다”라는 홍보기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건축·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 건물 구조.
일제강점기에 건축·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 건물 구조.

■ ‘100년 신암양조장’의 ‘신암생막걸리’ 명성
예산군 신암면 종경길 45 길가에는 100년의 세월과 전통을 간직한 ‘신암양조장’이 자리하고 있다. 예산 신암면사무소를 지나 종경리 마을의 도로변 파란 지붕의 집이 바로 ‘신암생막걸리’로 유명한 신암양조장이다. 지붕 위로 솟은 붉은색 굴뚝이 눈에 들어오고, 뒤쪽의 2층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 일본식 건물구조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는 98년의 세월을 견뎌온 집이다. 1960~1970년대에는 시골 마을에서 양조장을 한다고 하면 동네 유지로 불릴 정도로 부의 상징이었으며, 지역주민들의 생계를 이어가는 일터였다.

노란색 벽면의 양조장 건물 입구에는 ‘KBS 6시 내고향’과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프로에 소개된 내용이 ‘100년의 신암양조장’과 ‘신암생막걸리’의 명성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신암양조장은 1926년경에 설립, 운영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지역주민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신암생막걸리’를 생산하는 양조장이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영업을 했다는 자료도 남아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소화(昭和, 1926년부터 사용된 일본 연호) 시대의 술 항아리 7개가 있다. 어른 가슴 높이보다도 높은 막걸리를 빚는 400리터의 큰 항아리에는 소화(紹和)라는 색 바랜 글자가 희미하다. 일본 다이쇼 천황이 사망하고 히로히토(裕仁)가 황위를 계승한 1926년을 소화(紹和) 원년이라 하니 100년의 세월을 함께 한 항아리다.

현재 신암양조장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건축·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 건물구조 일부가 남아 있으며, 100년 세월을 견뎌온 빛바랜 항아리와 영업 관련 자료 등이 남아 있다. 또 1958년도에 중수했던 상량문이 있어 이를 근거로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예산군의 소중한 근대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예산군은 지난 2017년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이 과정에서 신암양조장의 가치에 주목하고 충남도로부터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신암양조장은 고 조은근 대표가 50여 년을 운영했고, 그 뒤를 이어 현재의 김윤도 대표가 40여 년을 운영하고 있으니 두 사람의 삶의 무게만 해도 90년 세월을 훌쩍 넘는다. ‘선양소주의 원조가 바로 이곳 신천소주(신암양조장의 옛 이름)였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김윤도 대표(72)는 직원으로서 사장으로서 함께 한 40여 년, 막걸리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김 사장은 군대 가기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다가 그동안 모은 돈으로 2005년 이곳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김 대표에게 신암양조장은 평생을 함께한 일터이며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 대표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밀가루 반죽과 종국균(효모)을 넣고 발효를 시키는 전통방식으로 막걸리를 생산한다. 완성하는데 10일 이상이 걸리고 하루 생산량이 580리터 한독으로 대량생산되는 기업형 막걸리와 비교할 순 없지만 지역의 가정이나 마트, 택배를 통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신암막걸리를 들고 있는 김윤도 대표.
신암막걸리를 들고 있는 김윤도 대표.

■ 100년 세월과 함께 한 전통의 맥을 잇다
100년 세월과 함께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신암막걸리. 신암양조장을 설립하고 운영하다 돌아가신 조 대표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며 막걸리 제조과정 또한 옛날 방식 그대로 운영하고 있는 김윤도 대표의 고집이 현재 신암막걸리의 명성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란다. 김 대표는 오늘도 새로운 백년을 기약하며 아들(김철민)에게 대를 잇게 하기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실행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 대표는 신암생막걸리 제조에 대해 “250kg의 숨 쉬는 항아리에는 발효가 시작된 3일 후에 거품이 가장 많고, 발효균이 살아 있는 생막걸리의 유효기간은 생산한 후 대략 10일 정도”라며 “일반 막걸리는 유통기간을 늘리기 위해 따로 살균처리를 하지만, 효소가 살아 있는 생막걸리는 사이다처럼 톡 쏘는 개운한 뒷맛 때문에 음주 후 뒷골이 아프지 않다”는 설명이다.

김대표는 “지난 2005년 이곳을 인수해 40여 년을 신암양조장을 지켜왔다”고 설명하면서 “1970년대에는 하루에 400말이 넘는 막걸리를 만들었고, 배달 직원만 30여 명으로 도에서 주세를 가장 많이 냈다”며 “우물 하나로는 부족해서 우물 하나를 더 팔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신암생막걸리 맛의 비결은 깨끗한 물과 오랜 전통방식의 발효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곳에는 옛날부터 사용하던 숨 쉬는 큰 항아리와 누룩 틀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막걸리가 있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는 김윤도 대표는 취재기자에게도 “신암생막걸리 맛부터 보라”며 바가지로 푹 떠서 권한다.

김 대표는 “마을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이곳에 와서 자기 집 소를 끌고 와 우마차에 막걸리를 싣고 배달하는 일을 하기도 했고, 할머니들은 하루에 30원에서 50원을 받고 병 닦는 일을 했다”고 과거를 회상하며 “어렵던 그 시절, 그래도 정은 넘쳤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어 “1970년대, 그 당시 남자들이 연탄공장에서 일하면 50원씩을 받는 시대였다”며 “쌀 한 가마니가 1200원이었던 그 시절에 하루 일당 30원을 받아 한 달 월급 900원으로 쌀 한 가마를 사기 어려웠던 게 그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며, ‘요즘은 이틀만 잡부 일을 해도 쌀 한 가마를 살 수 있는 시절이 아니냐’고 반문하며 웃었다.

우리는 어쩌면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이 시대에 정신의 빈곤을 동시에 갖고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1960~1970년대, 그 시절에는 배고픔은 있었지만 이웃 간에 정이 있었고, 가족과 동고동락하는 정이 있었다. 그 시대에는 이곳 주민들이 일을 해서 돈을 벌 곳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에 신암마을 일대의 주민들에게는 신암양조장이 큰 직장이었다’고 한다. 배고팠던 시절, 새벽에 일찍 일어나 신암양조장에 와서 일하고, 누룩 죽만 얻어먹어도 감사했던 시절이었다는 설명이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배고픔을 서로 달래려고 막걸리 한 사발씩 나누던 이웃 간, 친구 간, 가족 간의 따뜻한 나눔의 정이 정말로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음에랴. 노란 양은주전자에 반쯤 담긴 막걸리를 사들고 오면서 주전자 부리로 조금씩 맛보던 어린 시절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100년세월간직한예산신암양조장의신암생막걸리 2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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