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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순신 장군,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결성향교 테마여행 흐르는 길

2024.07.22(월) 20:13:17 | 홍주신문 (이메일주소:rlarudal4767@daum.net
               	rlarudal4767@daum.net)

이순신의장인방진의집‘5방진관’
이순신의 장인 방진의 집 ‘5방진관’.

이순신 관련 유적은 바다의 격전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지에도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아산 현충사이며, 백의종군 길 그리고 조선수군 재건의 길도 있다. 그리고 백의종군이나 수군재건을 위해 다녔던 경로에 이순신이 잠을 청했던 민가나 관청, 그 지역의 양반집들도 있다. 

이번 테마여행은 그 중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재건로가 주제이다. 

1597년 7월 15일(음력)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왜군에 궤멸 당하고, 임진왜란기 이순신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웠던 많은 장수들이 전사했다. 원균도 육지로 도망치다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순신은 권율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 중 칠천량 해전에 대한 비보를 듣는다. 그리고 조정에선 7월 23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3일, 진양(진주)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의 사랑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교지를 받았다. 조선수군 재건은 경남 진주에서 하동을 거쳐 전남 구례∼곡성∼순천∼보성∼장흥∼강진∼완도∼해남∼진도 등 540여㎞에 달하는 44일의 여정이다. 이 중에서 보성과 장흥을 중심으로 답사 일정을 잡았다.

보성에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집이 있는데, 이순신의 처갓집이다. 이순신이 결혼 후 무과급제 전까지 처가살이를 하며 장인에게 활을 배운 것으로 전한다. 방진은 조선 3대 명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순신이 활에 능했던 이유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순신은 조선수군 재건을 위한 44일의 여정 중 무려 9일 간이나 보성에 머무르게 된다. 

이순신은 군관 9명, 병사 6명과 함께 길을 떠나 구례와 곡성에서 병사 60명을 모으고, 순천에서 무기를 확보했다. 그리고 당시 조양현성의 조양창(군량미 보관 창고)에 있던 600석 규모의 군량미를 확보했다. 그리고 보성읍성으로 들어와 9일을 머물게 되는데,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교지를 전한다. 

이에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다’는 장계를 쓰며 항명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이다. 이순신은 모함으로 옥고를 치르고 백의종군하면서 사실상 선조를 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출옥 후 단 한 번도 망궐례(초하루와 보름에 도성을 향해 절을 하는 것)를 행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순신은 망설였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교지대로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한다면 왜군이 남해를 돌아 서해까지 올라와 왜군에 군수물자를 보급한다면, 왜군은 분명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유린하고, 한양이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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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상유십이 장계를 쓴 누각 ‘5열선루’.

이순신이 수군 재건의 길을 걷게 된 이유도 바로 이 제해권을 지켜야 그나마 전쟁에서 승리할 일 푼의 확률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이미 임진왜란기에 증명된 것이니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해야 나라가 살고, 백성이 산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상유십이라는 장계는 사실상 육군에 합류하라는 왕명에 대한 명령거부인 것이다. 

이순신이 상유십이의 장계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칠천량에서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쳤던 경상우수사 배설을 만났기 때문이다. 배설이 칠천량에서 도망치며 가져온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배를 인계받으려고 배를 정박한 위치를 물었으나, 배설은 ‘내가 왜 그걸 그대에게 말해줘야 하나?’라며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이순신이 상유십이 장계를 쓸 때 배설에게 판옥선 12척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배를 인계받기 전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배설의 판옥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었다면 참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단이 발생할 일이었다.

이순신은 황대중과 김억추, 조팽년에게 양곡 100석을 진도 벽파진으로 옮겨놓도록 명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에게도 전령을 보내 전함을 이끌고 가까운 군영구미(장흥)로 오도록 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8월 17일 군영구미로 갔다. 그러나 군영구미는 텅 비어있었다. 배도 배설도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지역민에게 향선(지역의 어선)을 구할 수 있겠냐고 묻자, 지역민은 구해오겠다고 말하고는 8월 18일 아침 안개 자욱한 바다를 헤치고, 인근의 향선 10여 척을 수배해 왔다. 이순신은 향선에 군량과 병사들을 싣고 장흥 회령포로 내려갔다. 

회령포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과 그 유명한 회령포결의를 맺는다. 그리고 정유재란 조선수군의 출정식을 갖고, 해남 이진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고문의 후유증과 그동안의 과로로 인해 며칠을 앓아누웠다. 고문의 후유증과 그로 인해 쇠약해진 이순신은 정유재란 내내 배 멀미를 앓았다는 내용이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조선 최고의 해군제독이 배 멀미에 시달렸다니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이순신은 정유재란기 주선수군의 첫 번째 해전이 된 해남 어란진으로 향한다.

다음은 충무공 이순신 테마여행, 정유재란 격전지 답사로 찾아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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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영구미. 당시 이곳에는 해창과 선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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