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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 한결같이 추사 선생 추앙 혜민스님

시·서예·음악·사진작가로 예술 경지도 높아 <br>우연히 찾은 추사고택에 끌려 평생 스승으로

2024.07.22(월) 16:29:52 | (주)무한정보신문 (이메일주소:lgj@yesm.kr
               	lgj@yes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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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지역 출신인 추사 김정희 선생을 평생 추앙해 40년 넘게 음식과 차 등을 올리며 본질적인 삶과 수행을 보여주고 있는 혜민스님은 시·서예·음악·사진작가이기도 하다. 거처는 ‘청화재’이다.

10일 저녁 혜민스님을 찾으니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지금까지 공개 안 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부처님을 모신 방으로 갔다. 보통 절에 있는 불상의 3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크기의 불상이다. 스님은 연신 미소를 머금고 “이 불상은 성자 모습 그대로”라며 “초기 불교 생전 모습과 거의 똑같은 얼굴”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불상을 발견했을 때 찍은 사진이 있다.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것”이라며 연꽃과 불상 사진을 보여줬다. 옆에 있던 김광호 종손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진”이라며 감탄했다. 스님은 “이 불상은 미국 미주 현대불교라는 유명 잡지에 실린 적 있다”고 말하며 잡지를 내밀었다. 잡지에는 연꽃과 불상 사진이 있고, 스님 스토리일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깨알 글씨로 여러 장이었다.


한장 사진이 가져다 준 대통령 관심

가부좌로 다시 자리에 앉은 스님은 44년째 추사 선생의 다례식을 해 온 이유에 대해 “나는 참 은사 복이 많은 사람이다. 다섯 분의 은사님에게서 평생 많은 것을 배웠다. 운허스님, 장설봉 스님 등 다 말할 수 없지만, 고석봉 선생님한테는 19년 동안 서예를 배웠다. 하루는 선생님이 ‘어딜 같이 가자’고 해 길을 나섰다. 같이 온 곳이 추사 고택이었다”며 “비포장도로였다. 산소와 묘지석이 기울어 있었다. 묘소 곳곳이 파여 보기에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사서 정비하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당연히 그래야지, 이놈아’라고 웃으며 호통쳤다. 그 자리에서 사람을 불러 기울어진 부분을 정비하고 돌아서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발길이 안 떨어진다’고 선생님께 말하니 ‘자네가 모셔야지’라고 했다”고. 

그 뒤부터 40년 넘게 한 해도 빼놓지 않고 후손을 대신해 다례식을 하고 있다. 후손들이 챙기지 않았을 때는 제사와 명절에도 예를 갖췄다. 추사 선생을 추앙하게 된 데에는 고 선생과 추사고택을 찾은 그 날부터라고. 

스님에 따르면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폐허가 된 추사 고택 사진을 보도했다. 당시 그 기자 작은아버지가 이명수 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과는 친분이 있다. 박 대통령은 그 기자를 청와대로 불러 ‘당신이 찍은 사진이 맞느냐’고 물었다. 사실을 확인한 박 대통령은 그 뒤 예산을 내려보냈다고 한다”라며 “그때부터 추사고택 관리는 군에서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님의 속세 나이는 올해로 80이다. 속명이 무엇이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출가한 스님에게 굳이 속명을 묻는 일은 부질없다는 생각에서다. 

어떤 연유로 출가했는지를 스님에게 묻자 “고등학교 다닐 때 제주도 한라산에 갔다. 마침 독일 고고학자가 와 있었다. 정정달이라는 통역 스님을 만나 호형호제하기에 이르렀다. 정정달 스님은 ‘아무리 봐도 입산해야 겠다’고 말하며 ‘입산해야 사람 되겠다’”고 단호히 말했다는 것. 

고민하다 출가를 결심한 스님은 당시 범어사에서 수행·정진을 시작했다. 은사인 장설봉 스님은 19세에 고시에 합격한 수재였다. 일제강점기 인천검찰청에서 일하던 중 조선인 핍박을 보고 그 길로 출가했다. 하루는 해인사에 가 있는데 해인사 주지 스님이 요사채에 불을 지피려고 뒷산 나무를 벴다 누군가의 밀고로 순사들이 해인사로 몰려왔다. 순사들은 해인사 주지스님을 수갑 채워 끌고 가려는데 은사스님이 나서서 경찰 뺨을 때렸다. 혼비백산 자리를 뜬 경찰들은 은사스님 신원조회로 실상을 알 수 있었다며 은사스님 비범함을 일화로 소개했다.


우연히 만난 스님과 호형호제 “사람되려면 입산해라”

스님은 “은사스님의 인품은 도저(심오)해 신부님 3명이 스님이 될 정도로 훌륭했다”며 “마찬가지로 추사에 대해서도 한두 마디로 할 수 없다. 추사 선생이 중국에 있다 우리나라로 돌아오려는데 중국 모든 석학들이 추사 선생을 흠모해 헤어질 수 없다하고 책을 보냈다. 6월 5일 단오절에 만나자며 약속했던 주학련 석학 등 12명을 6월 3일 추사 선생 탄신일에 차를 대접하고 있다”고 매년 다례식에서 중국 석학들의 위패를 놓는 배경을 설명했다.

시와 서예 등에 조예 깊은 스님은 작품 출품을 하지 않아 세속 평가를 받지 않는다. 스님은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시란 ‘천고의 흙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삼라만상의 오묘함을 담아 비바람과 눈보라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완당송이라는 김정희 선생 호를 딴 김동리 소설가의 친필 시.
완당송이라는 김정희 선생 호를 딴 김동리 소설가의 친필 시.

스님은 어느 날 친분있는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완당송’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완당은 추사의 또 다른 호다. 추사를 흠모하는 시를 써달라는 얘기였다. 김동리 소설가는 친필로 ‘사랑하는 이름이여. 이 땅 오천년 역사에 이보다 더 밝고 그리운 별 또 있으랴. 그 뛰어난 천재와 도저한 인품은 고귀영화에 깃들도다. 험악한 세상 차라리 유배. 님의 꽃 북의 눈이 언제나 그를 맞고 보냈네. 맞는 정 보내는 한 먹으로 갈아 종이에 옮기니 붓 같이 금강산 솟고 봄덕종이 울었네~(이하 생략).

스님은 후학을 위해 “귀한 인생을 사는데 아차하면 그 소중함을 놓쳐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 수 있다”며 “첫째는 청렴결백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는 덕을 베풀어야 한다. 셋째는 세상을 넓고 크게 보는 우주적 사관인 대략을 갖춰야 한다. 넷째는 극과 극의 소유자가 돼야 한다. 다섯째는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오천년 중국 역사에서 대접받는 사람은 추사밖에 없다”며 “고택에 가서는 항상 스승님에게 혼이 난다”고 말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스님은 “스승과 제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없다”고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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