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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한국 첫 여성 장관

충남여성열전② 임영신

2024.07.18(목) 17:09:33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한국첫여성장관 1

1949년 안동 출신 제헌 국회의원이 경북도지사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그해 5월 보궐선거가 실시되었다.

미 군정하에서 수도경찰청장을 지냈고 후에 국무총리까지 지냈던 영남 정치 거물 장택상과 임영신의 대결.

당시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높지 않았고 특히 보수색이 강했던 안동에서 여성, 그것도 멀리 금산 출신 임영신이 영남 토박이 거물 장택상과 맞붙는다는 것은 그 무렵 전국적인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성(性)의 대결에서 임영신이 승리했다. 정말 금산 출신 여성의 몸으로 보수적인 안동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쇼킹한 뉴스였다. 임영신은 그 후에도 재선에 성공하여 한국 정치사상 여성 정치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고 연이어 부통령 선거에도 3번 도전했었으나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임영신은 1899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고 호를 승당(勝堂)이라 했다.

전주의 기독교 학교 기전여학교에 입학했는데 아침마다 일본 천황과 일장기를 향해 절하는 것을 반대하다 일제에 곤욕을 치렀으며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로 와서는 반일운동을 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1919년 11월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부산에서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 그곳 기독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 일본인들에 의해 한국인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여기에 대한 자료를 수집, 미국으로 가서 이승만 박사를 만나 모든 것을 보고했다.

이것이 임영신과 이승만 박사와의 운명적인 인연이 되었으며 훗날 이승만 박사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완강히 거절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임영신은 이승만 박사에게 상당한 금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도왔다.

귀국해서는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그 시발이 중앙보육학교였는데 이것이 훗날 지금의 중앙대학교로 발전하였다.

바로 이 교육사업 때문에 일제에 잠시 협력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어서는 이런 이유로 임영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을 때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됐는데 이것은 또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그는 장관 시절 독직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되기도 했으나 결국 무죄선고를 받아냈다.

1960년 4·19 학생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떠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기회 있는 대로 그의 귀국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승만 박사는 1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 마우나라니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한 그와 정치적 동지였던 임영신도 1977년 2월 78세로 떠났으니 그가 집념을 갖고 키워온 중앙대학교 영신관 앞 하단에 잠들어 있다.
/변평섭 전 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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