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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충남동학농민혁명사 분수령 된 홍주성 전투 ‘동학군 참패’

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2024.06.13(목) 16:46:38 | 홍주신문 (이메일주소:uytn24@hanmail.net
               	uytn24@hanmail.net)

동학농민혁명군 전투지인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
동학농민혁명군 전투지인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면천에서 하루 유숙한 후 10월 25일 덕산군 구만리를 지날 때 다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26일 예산 신례원의 뒤뜰에 도착해 대진을 설치했다. 면천 승전곡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하자 그동안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동학농민군도 이곳으로 합류했다.

신례원에 유숙하던 동학농민군은 27일 새벽 관군과 유회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예산, 대흥, 홍주 지역의 유회군과 예산 관아에 소속된 관병들이었다. 25일 밤, 동학농민군이 신례원 뒤뜰에 진을 설치하자 예산의 유회군이 홍주목사 이승우에게 예산의 관군과 연합해 동학농민군을 습격하자고 했고, 이를 이승우가 승낙함으로써 신례원 전투가 시작됐다.

예산 신례원 전투는 관군과 유회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됐으나 동학농민군의 승리로 끝났다.
신례원 전투에서 관군 10여명이 희생됐지만, 동학농민군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동학농민군은 예산을 무혈입성했고, 목소리 전투 이후 덕포와 예포 중심의 연합전선에서 충남 전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하나의 통합된 조직으로 정비했다. 또한 관군 측에도 영향을 줘 대흥현감 이창세와 예산현감 이건, 심지어 부안수령 윤시영까지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홍주성으로 피신을 했다. 반면 위기의식을 느낀 유생들은 유회군을 조직했으며, 천안에서는 유생 380여 명을 모집 홍주로 출발시켰으며, 홍주에서도 유생을 중심으로 유회군을 조직했다. 홍주성에는 커다란 위기의식이 감돌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군 홍주성 전투지.
동학농민혁명군 홍주성 전투지.

■ 농민군, 홍주향교 유생 7명 항거하자 처형
신례원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곧바로 예산을 점령한 뒤, 10월 27일에는 역촌 뒤뜰에 머물고 있었다. 박인호 등 동학군 지도부는 서울로 바로 진격할 것인지, 아니면 홍주의 관군세력을 꺾기 위해 홍주성을 점령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를 계속했다. 논의 결과 서울로 직향할 경우 후미를 공격당할 수 있다는 중의에 따라 홍주성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을 했다. 당시 일본군은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직향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홍주는 내포 지역의 중심지로 무기와 식량 등을 조달하는데 용이했기 때문에 서울로 향하는 것보다 홍주를 먼저 점령하기로 했던 것이다.

홍주성 공격을 결정한 동학농민군은 27일 예산 역촌을 출발해 28일 덕산 역촌의 뒤뜰에 유숙했다. 이날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의 탄신일이므로 갖고, 홍주성 북문 밖 향교촌 뒤편으로 이동 진을 쳤다. 신무기로 총공격을 개시했으나 관·보부상대·일본군 연합세력이 완강히 항전, 팽팽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이처럼 향교촌에서 동학농민군은 대열을 둘로 나눠 일대는 간동으로, 또 다른 일대는 서문으로 진출하면서 홍주성 전투가 시작됐다.

이처럼 동학농민군이 홍주성을 공격하자 일본군도 이에 맞서 서문 밖 빙고치 등에 병력을 분산 배치했으나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일본군은 홍주성 안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동학농민군은 홍주성만 남겨두고 홍주 전역을 장악하고 홍주성 공략을 위한 전력을 논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박인호는 홍주성을 3~4일 포위한 후 항복을 받는 방안을, 박덕칠은 홍주성을 넘어 공격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박덕칠의 제안을 수용, 홍주성을 사이에 두고 동학농민군과 관군, 일본군의 전투는 해가 지면서 격렬하게 전개됐다.

박인호는 당시의 홍주성 전투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명령을 내려 성을 넘기로 하자 성안에서는 성 밖으로 불을 내던져서 성 밖에 있는 집들에 다 불을 질러 놓았소. 그런데 우리는 짚 한 묶음씩 가지고 성 밑으로 가서 그걸 쌓아놓고 성을 넘기로 하였으니 일이 어떻게 되었겠소. 어두운 밤 화광이 충천한 속으로 징을 울리며 성으로 달려 진격하는 우리 동학군들은 쌓아놓은 짚단 위에 불이 당겨 타죽는 사람 넘어가려면 안에서 총으로 맞아 쏘아 죽는 사람, 시간은 지나가건만 홍주를 쳐들어가기는커녕 성내의 사기만 더 북돋게만 하였소. 이리하여 격전에 또 격전이 거듭되고 동학군의 사자(死者)가 3만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나로서 지금 생각한다면 참으로 무모한 것이었고 또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하오. 날이 밝아오니 결국 홍주 함락은 단념할 수밖에 없음으로 진은 헤어지고 상경하자던 용기까지 무너지고 말았소.”

홍주성 전투는 10월 28일~29일 양일간 전개됐다. 이틀 전 예산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박인호의 지휘 아래 28일 오후 덕산 역말을 지나 홍주로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이날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홍주향교 뒤편 야산에 진을 치고 있었으나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압도돼 홍주성 안으로 후퇴했다. 홍주향교 주변에 진을 친 동학농민군은 홍주향교를 지키고 있던 유생 7명이 항거하자 즉시 처형했다. 이들은 지금도 홍주향교 앞에 ‘칠의비(七義碑;오경근, 최민지, 방세응, 방석규, 이준복, 서종득, 최학신)’로 남아 음력 9월 15일 제향을 지내고 있다.

 

동학농민군 희생자들이 묻혔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홍주의사총.
동학농민군 희생자들이 묻혔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홍주의사총.

■ 홍주성 전투 희생자 홍주의사총에 묻혀?
1894년 11월 25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에 아카마츠 쿠니후(赤松國封)소위의 당시 홍주성 전투 상보에 따르면 ‘△대대는 승전곡(勝戰谷) 전투 후 홍주(洪州)에 체재하면서, 가까운 읍과 여러 곳을 수색하여 거괴(巨魁;무리의 두목) 체포에 힘썼다. 그런데 지방민으로부터 동학도의 무리가 덕산(德山)에 모여서 홍주(洪州)를 향해 전진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25일 오후 2시 홍주성(洪州城) 북쪽에 있는 응봉(鷹峰)의 영산(嶺山)에 이르러 바라보니, 적이 전방 4㎞ 지점에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곧 홍주성에서 제2·제4분대를 동·북문 사이에, 제3분대와 제3소대의 제1분대를 서문 앞에서 빙고(氷庫) 언덕에 걸쳐 배치했으며 제5분대를 북문 왼쪽에, 제3소대의 제2분대를 서·남문 중앙으로 산개하고 빙고 언덕에 있는 우리 군의 퇴각을 엄호할 것을 명령했다. 또 제1분대를 응원부대로 하여 남문 뒤쪽 약 300m를 두고 적의 내습을 기다렸다. 그리고 조선 병사를 8명씩 나누어 각 문의 일본 병사 사이에 섞어 배치했다. △오후 4시 적이 덕산 가도 왼쪽 고지의 진지를 점령하였다.△오후 4시 25분 적의 한 부대가 빙고 언덕을 향해 전진해 왔다. 거리 400m에 있는 벼 수확을 끝낸 논(旱田)으로 접근해 오자 언덕 위에 있던 우리 군이 몇 번 일제사격을 퍼부어 적 수명을 쓰러뜨렸다. 그래서 적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자기편의 인원이 많은 것을 믿고 끝내 빙고 언덕까지 전진해왔다. 언덕 위에 있던 분대는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여 서문의 오른쪽과 왼쪽에 의지해서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저격했다. 이와 동시에 제5분대는 덕산 가도 서쪽 북문 앞 가까이에 있는 고지에 모여 있는 적을 향해 세 번 일제사격을 했다(거리 800m). 적은 이 사격에 놀라 두 대열로 갈라져 도로 동쪽 고지 숲속에 진을 쳤다. 이때 홍주병이 북문에 배치했던 대포 2발을 발사했다. 그 거리는 300m였다. 적이 흩어져 북쪽 숲속으로 들어가 갈라졌던 두 대열이 합쳐졌다. 이때 또 제2분대가 일제사격을 가해 적의 기세를 꺾었다. 적의 한 부대가 동문 전방 약 600m에 있는 숲속으로 들어가 서서히 전진해 왔다. 그리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연기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용하여 성 밖 100m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연달아 맹격해 오므로 응원대를 동문으로 증파하여 응전시켰다. 적은 밤이 되자 야음을 이용하여 대포를 동문 앞 40m 지점에 끌고 와, 동문을 마구 쏘았다. 우리 군은 최선을 다하여 싸웠다. 오후 7시 30분 총소리가 거의 멈추었다. 우리 군과 홍주 민병은 성벽에 의지해서 밤을 새워 경계했다. △26일 오전 6시 적은 세 방면에 엄호 병을 남기고 약 1500m 되는 곳에 있는 응봉 고지로 퇴각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오후 4시 30분 패잔병을 응봉으로 모아(빙고 언덕은 제외) 퇴각했다. 오후 5시 빙고 언덕의 적도는 해미(海美)방면으로 퇴각했다. 그래서 1개 부대(홍주병)를 내보내 추격했다. 오후 6시 속속 부상자와 도망자를 잡아 왔다. 포로의 말에 따르면 총인원이 6만이라고 했다. 그 실제는 3만 남짓 될 것이다. △27일 새벽부터 황혼에 이르기까지 속속 적의 도망자와 부상자를 잡아 왔고, 적이 해미로 퇴각했다고 보고해 왔다. 그래서 성벽의 우리 군대를 철수, 네 문에 복초(複哨; 2인1조의 보초병)를 배치해서 경계했다. △28일 오후 12시 30분 적의 1개 부대가 갈산(葛山;홍주에서 12㎞ 떨어진 곳)에 모여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듣고, 추격하기 위해 하사 이하 45명을 이끌고 오후 1시 출발하여 오후 5시 갈산에 도달했다. 그 지방민의 말에 따르면 같은 날 오전 해미로 퇴각했다고 했다. 잔당 10명을 잡아 오후 9시 성으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주성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박덕칠이 별동대를 조직하는 등 수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10월 29일 동학농민군은 대오를 수습하고 해미방면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10월 28일~29일 홍주성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만 내고 홍주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홍주성 전투에서 관군은 600~700명이었고, 동학농민군은 5~6만 명이 전투에 참여, 희생자를 3만 명으로 추정하지만 실제로는 200~300명으로 보고있다. 공주 우금치 전투 못지않은 피해가 발생했는데, 당시 희생자들이 홍주의사총에 묻혔을 가능성이 제기돼 실증사료를 바탕으로 진실규명이 요구된다.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11월 3일 예산에 집결했다가 해미성을 한때 점령했다 도비산으로 퇴각했다. 11월 11일 태안으로 집결했으나 홍주성 전투 이후 해미, 서산, 태안까지 퇴각한 동학농민군은 11월 중순 이후 일본군, 관군, 유회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잔혹하게 희생됐다. 내포동학농민군은 홍주성 전투 패배, 해미성 패퇴로 치명타를 입고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동학농민군의 함성은 일본군에 의해 좌절됐지만 우리의 역사에는 영원한 승자로 기록됐다.

홍주의사총 뒷편의 홍주의병기념탑.
홍주의사총 뒷편의 홍주의병기념탑.
홍주향교칠의비각.
홍주향교칠의비각.
처형된 홍주향교 유생 7명을 추모하는 칠의비.
처형된 홍주향교 유생 7명을 추모하는 칠의비.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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