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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조선후기 무신 종가의 자부심 계승

충남의 종가 6)당진 의령남씨 충장공파 남이흥 종가

2024.06.06(목) 00:10:20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의령남씨 종택. /남주현 종손

▲ 의령남씨 종택. /남주현 종손



조선후기무신종가의자부심계승 1



자손들이 대대로 살곳 ‘점지’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충장사 일대에는 충장공 남이흥(南以興, 1576~1627)의 후손들이 400년 넘게 터전을 잡고 있다. 충장공파의 가계는 좌의정(부총리급)을 역임했던 남지(南智, ?~1453)의 고손인 남응룡(南應龍, 1514~1555)대에 이르러 나누어졌으며, 이후 남유(南瑜, 1552~1598)와 남이흥으로 계승되었다. 

의령남씨 충장공파가 당진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남이흥의 증조부 남세건(南世健, 1484~1552)이 1536년 충청도관찰사(충청도지사)로 해미현 지역을 순찰하던 중 대호지면 도이리의 형세가 좋아 보여 자손들이 대대로 살 곳으로 점지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도 남응룡이 휴양지로 삼아 자주 왕래하였으며, 이어 남유·남이흥 부자의 사패지로 하사된 후 남이흥의 장남 남두극(南斗極, 1601~1665)이 서울에서 귀향하여 정착하였다.

한편, 당진 의령남씨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무신 가계를 형성한 종가이다. 남유와 남이흥의 순국이 후손들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쳐 대대로 많은 수의 무과 급제자와 근현대기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남이흥 종가 큰제사 모습. /남주현 종손

▲ 남이흥 종가 큰제사 모습. /남주현 종손


애국충절 표상 남유·남이흥 부자


남유와 남이흥 부자는 2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유명하며, 오늘 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남유는 1579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때 나주목사(나주시장) 겸 좌영장(연대장)으로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노량해전은 1598년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싸운 전투로 남유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 중군장으로 참여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활약을 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남이흥은 아버지의 전사를 계기로 무관이 되고자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술에 전념하였으며, 1602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경상도, 평안도의 병마절도사(사단장)를 역임하는 등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안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진무공신 1등에 책록 되었으며, 의춘군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서 안주성에 나아가 후금군에 맞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붙이고 적들과 함께 자폭하여 전사하였다. 국왕 인조는 남이흥의 충성을 높이 평가하여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곤룡포를 장군의 관 위에 덮어주라며 애도를 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의춘부원군으로 봉하고 충신정려를 내렸으며, 후손에게 대호지면 일대를 많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종손 남주현씨가 충장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종손 남주현씨가 충장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한국유교문화진흥원


근대 민족교육의 장 ‘도호의숙’


당진 의령남씨 종가 및 문중은 남이흥과 같은 충신을 배출한 가문으로서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당진 의령남씨 문중서당인 도호의숙은 1860년대 초 남이흥의 8대손 남석구(南錫龜, 1798~1868)와 조카 남보영(南普永, 1826~1868) 등이 설립하였다. 남보영의 아들 남규희(南圭熙, 1852~1902)는 문중 자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교육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본격적인 학당으로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남규희가 강학을 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화서학파 유학자 유진하와 이철승 등 인근의 학자를 초빙하여 한학을 전수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애국충절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도호의숙에 힘입어 문중에서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대호지 3·1운동을 주도했던 남주원·남계창·남상직·남상락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고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 파고다 공원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다시 당진에 내려와 4월 4일 대호지면 천의장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도호의숙은 도호학당, 도이리 강습소와 같은 형태로 명맥을 이어 가다가 1930년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폐쇄되었다. 


제사 간소화 탕·식혜 배제

당진 의령남씨 충장공파 종가의 제사는 남이흥 장군의 기제사(돌아가신 날 올리는 제사)인 불천위제사와 설날 및 추석 명절의 차례, 음력 10월에 묘소에서 지내는 묘제로 구분된다. 불천위제사의 경우 기제사의 특수한 형태로, 큰 공이 있거나 높은 학자인 조상을 4대 봉사 이후에도 계속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국가에서 특별히 허용한 제사를 말한다. 

불천위제사는 남이흥의 기일인 음력 정월 21일에 종택에서 진행하며, 제사를 올리는 시간은 당초 새벽에 지냈으나 1988년부터 후손들이 많은 참여를 위해 낮 12시로 바꿔 지내고 있다. 설날과 추석 차례는 충장사 사당에 모신 남이흥장군과 종손의 4대 조상께 올리며, 종손과 차종손 및 형제들만 참석하여 단출하게 진행한다.

이 댁에서 사용하는 제물은 제주, 메, 갱, 적, 편, 편청, 포, 초장, 육전, 어전, 무쌈, 낙지, 느리미, 두부전, 면, 숙주, 수육, 청포묵, 김, 간장, 김치, 굴젓, 수란, 조기, 대추, 밤, 배, 감, 사과, 귤, 호두, 다식, 산자, 강정, 약과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탕과 식혜는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문중 어른들이 제물을 간소화하기 위해 없앤 것이라고 한다. 또한, 제사를 모시는 조상에 대하여 맞춤형으로 준비하는 점도 흥미롭다. 예를 들면 왜적에게 목숨을 잃은 조상의 제사에는 일본산 재료와 일본인의 기술로 만들어진 음식은 절대 올리지 않으며, 장티푸스에 걸려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상에는 미역국을 안 쓴다고 한다.


조선후기무신종가의자부심계승 2


종가문화 전통 계승·활용


현재 당진 대호지면 도이리 충장사 일원의 종택에는 남이흥의 14대 종손 남주현씨(1949~)가 거주하며, 당진시와 함께 무신 종가의 전통을 잇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먼저 남이흥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가장 큰 행사로는 당진문화원에서 주관하는 “남이흥장군 문화제”가 있다. 1989년부터 매년 9~10월경 당진시내와 충장사 일원에서 2일간 개최된다. 주요 행사로는 시가행진 재현, 전국 남녀 시조 경창 대회, 충남도지사배 궁도대회·마라톤 대회·씨름대회 등이 있다. 

현재 충장사 일원에는 “무인종가 체험관 및 무예 체험공원” 조성을 추진(2027년 완공) 중에 있다. 

올해 남이흥 장군 문화제는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에서 올해부터 신규로 추진되는 「국가유산 호국선열 기념행사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다른 해 보다도 더 의미 있고 풍성한 문화제가 기대된다.
/서흥석 한국유교문화진흥원 유교문화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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