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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바닷속 고려청자, 800년 깊은 잠에서 깨어나다

격동의 충남 100년 - 안흥 주꾸미가 걷어 올린 해저유물

2023.11.16(목) 16:24:4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현재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는 서해에서 발견된 과거 난파선 마도1호선 재현선이 전시되어 있다. 복원을 통하여 우리 전통배의 규모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은 마도1호선 재현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 현재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는 서해에서 발견된 과거 난파선 마도1호선 재현선이 전시되어 있다. 복원을 통하여 우리 전통배의 규모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은 마도1호선 재현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선 수중발굴 조사하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선 수중발굴 조사하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태안 앞바다에서 출수된 유물.(사진 왼쪽부터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 매병과 죽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 태안 앞바다에서 출수된 유물.(사진 왼쪽부터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 매병과 죽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07년 태안 앞바다 뻘밭서 발견
청자접시 끌어안고 잡힌 주꾸미 단서
침몰 고려청자 운반선서 유물 발굴

안흥 바닷길 암초로 선박사고 잦아 
조선왕조실록 침몰사고 기록도


2007년 5월의 안흥 앞바다에서 주꾸미를 잡던 어부들은 주꾸미가 은신처처럼 매달린 물체를 낚아 올렸다. 그 물체는 뻘에 오랫동안 묻혀 있어 쉽게 그 정체를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진흙을 씻어 내자 그것이 고려 청자와 항아리인 것을 확인하고는 크게 놀랐다. 어부들은 즉시 문화재청에 신고를 했고 급히 달려온 문화재청 전문가들은 이 물건들이 1131년 전라도 강진에서 고려의 왕도 개성으로 보내지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돼 바다 뻘에 묻혔던 것임을 확인했다.

주꾸미 때문에 800년 긴 세월, 해저에 묻혔던 국보급 문화재들이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주꾸미는 1300여점의 고려청자와 항아리만 걷어 올린 것이 아니라 선원들이 항해하면서 사용하던 밥그릇, 취사도구 등 3만여점의 유물을 세상에 토해 냈다. 심지어 이들을 싣고 가던 난파된 배도 그대로 수장돼 있었는데 고려시대 선박 연구에 도움이 될 소재가 많았다.  더욱 주목을 끈 것은 목간(木簡)들이었다. 가끔 육지에서 목간이 발견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해저에서 목간을 찾아 낸 것은 처음이었다. 목간은 종이 대신 나무를 잘라 글을 써넣은 것. ‘전라도 강진에 사는 아무개가 개성에 있는 귀족 □□에게 청자 9점을 올립니다’등, 주로 목간의 내용은 보내는 사람의 직책과 이름, 받을 사람의 직책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요즘의 택배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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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타난 연대로는 고려의 무신정권 즉 ‘崔씨 정권’시대로 보여 진다. 최씨 정권은 최중헌, 최우, 최향 등 최씨 형제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던 62년 동안을 말한다.  이들은 왕궁보다 더 호화로운 저택에 살면서 정부군보다 강한 정에화된 사병(私兵)도 거느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려의 부패를 바로 잡고 개혁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더 타락하고 형제간의 암투도 극심했다. 그런데 목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최씨 정권이 지방조직까지도 장악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공생관계는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왕족과 최씨 집권자들이 강화도로 피난해 왔을 때도 계속됐음이 이들 목간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몽고군의 끈질긴 공격에 1270년 왕은 물론 최씨 정권도 강화도에서 나왔지만 삼별초는 계속 강화도에 남아 몽고에 대항했는데 강진의 토족들은 한동안 이들과 연을 이어 갔던 것 같다. 그렇게 목간은 많은 사실(史實)들을 말해 준다.

이처럼 태안앞 바다 안흥항 인근에서는 2007년 5월 말고도 여러번 해저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에 주목을 받아 왔다.  왜 태안 안흥 앞바다가 해저 유물의 보고가 되었는가? 더 말할 것 없이 안면도에서 이곳 안흥과 신진도 등 바닷길이 암초가 많아 매우 험했기 때문에 개성과 한양으로 가던 배들이 좌초되는 일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안면도를 태초에 육지였던 것을 짤라 섬으로 만들고 운하를 건설해 새로운 바닷길을 만들었을까. 안면도를 섬으로 만드는 작업은 고려 인종 때부터 시작하여 조선 현종 때까지 11차에 걸쳐 500년 세월이 필오했다. 그 무렵에는 굴착기 같은 현대적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순전히 인력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섬이 된 안면도(安眠島), 즉 편안히 잠을 자는 섬이란 뜻의 지명을 붙였으니 얼마나 이 지역의 항해가 안전하기를 간절히 원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 지역 바닷길을 통해 고려 때는 개성, 조선 시대에는 한양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올라가는 세곡(稅穀)이 40만석이나 되었다니 이 바다 길이 나라의 안보가 걸린 생명선이나 마찬가지 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 당시 장비의 열악함과 국가재정의 어려움에도 안면도 운하 개설을 위해 역대 왕조가 집념을 가진 것은,  이곳에서의 해난사고로 국가적 손실이 너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안해양유물전시관 전시 모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 태안해양유물전시관 전시 모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조선실록에 의하면 1395년부터 1455년까지 60년 동안 선박 200척이 이 곳에서 좌초됐고 1200명이 사망했으며 1만 6000석의 쌀이 유실되는 사고가 발생했으니 그야말로 안면도가 평안해야 조정이 평안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된 처참한 상황에서도 인조는 전국에서 백성을 모아 안면도 운하 건설에 투입했을까? 그래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은 또 다시 운하 노역에 시달리면서도 마침내 1638년 안면도 운하가 뚫리는 역사적 대업을 이르켰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험난한 역사를 지닌 태안반도는 이 시대에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다.  안면도, 안흥항, 신진도 등이 있는 태안반도가 풍부한 해산물과 풍광으로 365일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고 특히 신진도에 세워진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을 국내 유일의 바닷속 문화유산을 발굴, 조사, 전시를 하는 곳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훌륭한 역사 교육장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난파선 8척과 3만여 점의 보물(청자음각연회절지문 매병 등) 그리고 죽찰 등 1300여 점의 고귀한 문화재들이 전시돼 있다. 물론 2007년 이후에 발굴된 유물들도 상당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고려시대의 선박 마도 1호선을 완전히 재현시켜 놓은 것이다.

이 가을 태안반도를 돌아보고 여기 해양유물전시관에 들러 지난 역사에 잠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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