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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1500년 침묵 깨고 세상에 드러난 백제의 품격

격동의 충남 100년 - 무령왕릉 발굴 비사 ②

2023.09.06(수) 17:58:14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1971년 7월 무령왕릉 발굴 당시 조사단원들이 벽돌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 1971년 7월 무령왕릉 발굴 당시 조사단원들이 벽돌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무령왕릉 입구 모습. /도정신문팀

▲ 무령왕릉 입구 모습. /도정신문팀



1971년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
지석 통해 무덤 주인 밝혀져
당시 경험 부족 졸속 발굴 지적

무령왕 백성 돌보고 왕권 확립 힘써
국제 교류 활성화 나라 위상 높여


계속되는 왕들의 암살 등 귀족과 지방 토후들의 음모로 국가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서기 501년 일본에서 돌아온 무령왕이 25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먼저 선왕을 암살한 좌평 백가의 목을 베고 왕권을 확립하는 등 국가 체계를 바로잡는 한편 백제의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백성의 추앙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 중국 등 외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여 백제를 해양 강국으로 만들어 ‘백제(百濟)’라는 나라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이처럼 위대한 왕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그의 사망 연도는 언제인지, 망각의 역사 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치 않아 1500여년 ‘침묵의 세월’을 깨고 무령왕의 실체를 들어내게 했으니 1971년 7월 5일부터 시작된 발굴이 그것이다.

그날 공주 송산리에 있던 6호분의 배수로 작업을 하던 인부가 흙속에서 벽돌 하나를 발견하고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에게 보고를 한것이 발단이 되었다. 김영배 관장은 이것이 왕릉임을 직감하고 김원룡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보고했고 김원룡 관장은 즉시 10여명으로 발굴단을 꾸려 공주 현장으로 내려왔다. 그때도 무더위에 비까지 많이 내리고 있었는데 ‘왕릉이 나왔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취재 기자들이 몰려왔고 공주 주민들도 들뜬 마음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취재를 위해 그 현장에 있었다. 기자들과 공주 주민들은 빨리 발굴하라고 성화였고 취재 경쟁이 뜨거워진 기자들 사이에선 가짜 뉴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발굴단은 원칙대로 주변 기초조사 등 단계를 거쳤어야 하는데 밤 새 배수작업을 하고는 7월 8일 새벽 5시부터 발굴작업을 개시했다. 정말 후진국에서도 볼 수 없는 주먹구구식 발굴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에는 고분입구가 보이자 막걸리, 수박, 복어로 간단한 위령제를 올렸다. 김영배 관장이 절을 했다. 이어 입구를 막아 놓은 벽돌을 뜯어내자 무덤 안에서 바람이 빠르게 빠져 나오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하얀 수증기가 나왔다. 1500년이나 밀폐된 공간이 갑자기 열리자 나오는 현상인데 사람들 중에는 무덤안에 있던 혼령이 빠져 나간 것 아니냐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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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단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석수(石獸), 즉 수호신 역할을 하는 돌짐승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점이 제기됐다. 철저한 준비없이 갑자기 문을 열게 되자 석수의 붉은 입 색깔이 탈색되었다는 것. 무엇보다 무령왕릉의 최고의 성과는 지석(誌石)이 나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고 하고, 서기 462년에 태어나 523년 5월, 62세에 운명했으며 장례는 3년 후 525년 8월에 모셨다고 새겨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묻힌 왕비에 대한 기록도 있었는데 이와 같은 지석이 있는 경우는 세계 발굴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가령 공주나 경주에 왕릉으로 보이는 능이 많지만 왕릉이라 못하고 ‘고분’으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지석이 없어 누구의 능인지 주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능에서는 지석 외에도 무령왕 머리에 씌웠던 금장식, 왕비의 베개, 은팔찌, 동거울, 중국돈, 심지어 수저와 젓가락 등 108종 4000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러면 고고학자들이 위치와 형태등을 깊이 있게 조사하여 옮겨야 하는데 급하게 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몇 년 걸려야 할 작업을 하룻밤 사이에 해치워 버린 것이다. 국내 취재 기자들과 NHK 일본 TV등 외국기자들, 그리고 주민들이 능 내부, 현실을 보여달라고 아우성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 없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발굴단장 김원룡 박사도 훗날 자서전에서 ‘내 일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고백할 만큼 상식을 벗어난 발굴을 한 것이다.

이 난리속에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이 현장을 다녀가자 곧 연락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물을 보고 싶어 하니 몇 점 청와대로 가져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 금팔찌 등 주요 유물들을 보자기에 싸서 서울로 출발했는데 일반 시외버스를 탔다. 그 귀중한 유물을 보자기에 싼 것도 그렇지만 버스를 이용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진국 같으면 별도의 금고에 넣어 경찰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울로 가야는데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발굴 중에 있는 유물을 대통령이 보고 싶다고 해서 이리저리 옮겨서도 안되는 것은 물론이다.

어쨌든 이렇게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이 청와대를 다녀오는가 하면 발굴유물 모두 서울로 가져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공주 주민들이 반대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플래카드를 들고 집회도 강행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협소한 국립 공주박물관으로는 이 거창한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할 수가 없다고 판단, 1973년 웅진동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박물관을 신축하고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전시하게 되었고 일부는 서울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전시가 어려운 것은 복제품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출토품 중 국보로 지정된 유물만도 12종에 17건이나 되고 있다.

새로 지은 공주박물관 입구에는 무령왕릉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석수(石獸)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박물관 뒤편에는 무령왕릉 발굴의 공로가 많은 김영배 관장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딴 우보정(牛步亭)이라는 조촐한 정자가 있어 그 날의 세기적 감격을 되새기게 해준다.
/변평섭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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