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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무령왕은 왜 日本에서 태어났을까?

격동의 충남 100년 - 무령왕릉 발굴비사①

2023.08.24(목) 22:24:1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가카라시마(加唐島)는 대한해협에 있고, 행정구역상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에 속하는 섬이다. 백제 25대왕 무령왕이 탄생했다고 전해지는 섬으로 무령왕의 탄생지와 탄생기념비가 있다.  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전경. /사가현 공식사이트

▲ 가카라시마(加唐島)는 대한해협에 있고, 행정구역상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에 속하는 섬이다. 백제 25대왕 무령왕이 탄생했다고 전해지는 섬으로 무령왕의 탄생지와 탄생기념비가 있다. 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전경. /사가현 공식사이트


무령왕 탄생지(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사가현 공식사이트

▲ 무령왕 탄생지(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사가현 공식사이트



백제, 일본에 문화 전파 교류 활성화  
무령왕 탄생설화 가카라시마서 태어나
이름은 ‘사마’ 훗날 귀국해 왕위 등극
음력 6월 1일 일본서 무령왕 탄생제



대천 해수욕장에서 바다에 버려진 라면 봉지나 폐트병은 얼마 후에는 일본 규슈(九州) 해안, 특히 가라쓰(唐津) 해변에서 발견하게 된다. 우리 서해의 해류가 그렇게 흘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해류는 백제와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를 운명적으로 이어 지게 했다. 

우리 백제는 일본에 벼농사를 비롯 많은 문화를 전수했다.

문화 뿐 아니라 많은 백제인들이 이곳을 통해 일본 권역에 퍼지면서 한때 주류사회를 형성했다.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천황이 68세 생일을 맞아 고백한 이야기도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나 자신은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라고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본 황족의 피에도 백제 무령왕의  피가 흐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연을 이어온 것이 우리 서해를 흐르는 해류의 역할도 도외시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일본 역사에까지 큰 족적을 남긴 무령왕은 어떤 인물인가? 9월 23일부터 개최되는 백제문화제를 앞두고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을 이루었던 무령왕을 생각하고 아울러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의 숨은 이야기를 되돌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무령왕은왜에서태어났을까 1


서기 475년,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가 보낸 첩자 도림의 꾐에 빠져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고 지나친 토목사업으로 국력을 소비한 끝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무참히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그 동생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공주(웅진)로 도읍을 옮긴다. 하지만 문주왕은 공주에 온지 2년만에 병관 좌평 해구라는 토후 세력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만다.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길 즈음에는 귀족과 토후 세력이 막강하여 왕권이 위축되어 있었고 귀족들 사이에도 알력이 심했다. 문주왕이 암살되자 13세의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삼근왕이다. 그런데 이 무슨 변고인가? 삼근왕이 15세가 되던 해 또 암살을 당하고 만다. 그래서 문주왕의 동생 곤지(昆支)의 아들이며 암살로 죽은 삼근왕의 사촌인 동성왕이 즉위한다. 그러나 동성왕 역시 한창 왕권강화와 국방에 힘쓰던 중 백가라는 귀족에 의해 살해당한다.

즉위하는 왕마다 몇 년 안되어서 모두 시해를 당하는 불안한 정세속에 무령왕이 40세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때 神으로부터 땅을 산다는 매지권(買地券)이 나왔는데 여기에 무령왕의 생년월일, 사망일이 기록돼 있었다. 그 결과 무령왕의 동생 동성왕이 먼저 즉위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왜 동생이 먼저 왕위에 올랐는지는 미스터리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이 살아있을 때 고구려 공격에 몰리게 되자 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내 구원병을 청하게 한다. 곤지는 일본으로 떠나면서 왕이며  형님인 개로왕에게 왕비를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왕비는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도 형수이며 왕비인 임신한 여인을 굳이 동행하겠다고 한 것은 무슨 사연일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곤지가 왕비와 몰래 사랑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이야기한다. 뱃 속의 아이도 곤지의 아들일 것이고 그래서 왕은 이들을 일본으로 추방을 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왕이 왕비가 출산하면 아기는 돌려달라는 조건으로 이들의 출국을 승인한 것을 보면 임신한 아기는 개로왕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어쨌든 이런 미스터리 속에 곤지는 일본으로 가는 중 형수인 왕비가 심한 산기를 느껴 규슈의 가카라시마에서 아기를 낳았다. 곤지는 아기 이름을 섬에서 났다 하여 시마군이라고 명명하고 형 개로왕과의 약속대로 배 한 척을 마련하여 백제로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 어린 아기를 그 시절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보냈을까? 오히려 일본에서 장성하여 백제 왕들이 계속 암살되는 혼란이 계속되자 이를 평정하기 위해 백제로 건너왔으리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그렇게 하여 501년 왕위에 오르니 25대 무령왕이다.


공주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무령왕 탄생 기념비(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동북아역사넷

▲ 공주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무령왕 탄생 기념비(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동북아역사넷



가카라시마(加唐島)에는 무령왕이 태어난 동굴이 있고 아기를 씻었다는 우물도 있다. 주민 200여명 밖에 안되는 작은 섬이지만 이곳 주민들과 가라쓰(唐津)시 당국이 이곳을 성지처럼 잘 보존하고 있다. 심지어 해마다 무령왕 탄생일인 음력 6월 1일에는 무령왕 탄생제를 열고 무령왕을 추모한다. 이때는 공주시민들도 많이 참석하는데 몇 해전 필자도 이 행사에 참석했었다. 우리 일행이 탄 배가 섬에 도착하자 주민들과 학생들이 부두에 도열하여 환영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섬은 온통 동백나무 숲으로 뒤덮였고 일본에만 있는 금송도 잘 가꾸어졌다. 이 금송이 바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무령왕 관임이 과학적 분석으로 확인된 바 있다. 또한 2006년에는 공주 시민들이 모금을 하여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처럼 가라쓰와 공주시와의 관계가 활발해 진 것은 아무래도 1971년 무령왕릉의 발굴이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어쨌든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에는 무령왕을 사마왕(斯麻王)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도 일본어로 섬을 뜻하는 ‘시마’와 연관이 있는 만큼 가라쓰 섬을 소개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참고적으로 왕비를 데리고 이곳에 왔던 곤지는 일본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일본인들은 그를 신으로 모시고 그가 세상을 떠난 날짜에 축제까지 개최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상당한 세력을 누렸던 것 같다.?
/변평섭 전 충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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