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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 황화정 옛터를 찾아서

황화정의 교귀의식 재현과 ‘황화정-비’ 본래의 자리로

2023.08.18(금) 10:24:59 | 놀뫼신문 (이메일주소:nm4800@daum.net
               	nm4800@daum.net)

[기획탐구] 역사를 잊은 민족 미래는 없다

삼남대로 황화정 옛터를 찾아서
황화정의 교귀의식 재현과 ‘황화정-비’ 본래의 자리로

연무읍 황화3리 어르신회관 앞에는 황화정(皇華亭)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 ‘황화정-비’가 세워져 있다. 
이 ‘황화정-비’는 1670년(현종 11) 12월 당시 여산군 정채화 군수가 황화정을 새롭게 복원하며 세운 비석이다. 높이 128㎝, 폭 55㎝, 두께 17㎝의 350여 년 전의 비석(碑石)이 “왜, 그 자리에 세워져 있는지?” 본지가 옛 삼남대로를 따라 ‘황화정-비’와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현재 황화정비 위치

▲ 현재 황화정비 위치


삼남대로황화정옛터를찾아서 1



■ 황화정(皇華亭)의 역사적 의의

황화정은 조선 초 전라도 신?구 관찰사가 도정을 인수인계하며 교귀의식을 거행하던 곳으로 중국 사신 등을 영접하는 곳으로도 사용하였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인 현 논산시 연무읍(조선시대에는 여산군 합선면 원황마을) 가름재에 황화정이 창건되었다. 또한 충청도와 경상도 접경지역인 문경새재에는 ‘교귀정’을 세워 경상도 신?구 관찰사가 교귀식을 거행하였다. 
황화정은 창건되었다가 소실되었고, 복원되었다가 다시 소실되는 과정을 겪었다. 황화정은 1460년대 여산군 관아에서 11리쯤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건물은 원황마을 가름재 분기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임진왜란(또는 정유재란) 때 불타서 훼손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 후 1669년(현종 10)에 정채화(1611~1677년)가 군수로 부임하면서 그 이듬해 공사를 마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1862년(철종 13) 충청도 은진에서 윤희규가 일으킨 민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황화정은 원황마을에 터를 잡고 목조 기와지붕을 한 정서향의 전통 한식 구조이며, 부속시설은 교귀식을 할 때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고 부임 감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현의 대청과 활터가 있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황화정기」에  황화정의 내력이 잘 기술되어 있다. 

황화정은 어느 때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옛날 중국 서신이 왔을 때나 혹은 바다를 건너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때 이곳에서 숙박과 음식을 제공했다. <여지승람>을 상고해 보면 여산군 관아에서 11리쯤에 있었다. 무릇 <여지>(輿地)에는 이 정자가 성화연간(成化年間: 1465~1487년)에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 무너지고 없어진 것이 어느 때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임진년 난리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1669년(현종 10) 겨울에 정채화가 여산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직무를 수행할 때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으면서도 먼저 정자를 1670년 9월에 시작하여 12월에 복원하였다. 그때 옛 시에 이른바 정자에 이르기 전에 이름이 이미 아름다웠던 것이 오늘의 일을 준비해서 말한 것 같다. 정자는 3층인데 동쪽을 뒤로하고 서쪽을 바라보는 묘좌유황이다. 호서와 호남이 교배하는 형세다. (이하 생략)

황화정기

▲ 황화정기


봉곡서원 비림 (황화정비 좌측 첫 번째)

▲ 봉곡서원 비림 (황화정비 좌측 첫 번째)


■ 황화정-비의 애뜻한 사연

연무읍 황화3리 어르신회관 앞에 세워져 있는 ‘황화정-비’는 높이 128㎝, 폭 55㎝, 두께 17㎝이며, 석질은 희색의 석회암을 원두형으로 음각하였다.
1670년 12월, 여산군 정채화 군수는 황화정을 새롭게 복원하고,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청하여 기문(記文)을 짓고 ‘황화정-비’의 제자(題字)와 음기(陰記)를 친필로 써서 석공을 불러 빗돌을 깎아 새겨서 길가에 세웠다. 이에 황화정을 지나는 관료와 백성들이 길잡이 이정표로 사용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런 ‘황화정-비’가 삼남대로의 기능이 다하면서 폐기되자, 비바람에 시달리다가 길이 무너지면서 빗돌이 넘어져 폭우에 떠내려가 수철천(水鐵川) 진흙 속에 묻혀버린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1970년 새마을사업으로 수철천 정비사업 중 ‘황화정-비’가 발견되었다. 당시 동래정씨들이 문중회의를 열고 자신들의 조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연무읍 고내리 효죽마을(솟대 배기)의 입구에 옮겨 놓았다.
이에 봉곡서원을 출입하는 선비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보존상태가 양호한 역사적인 미지정문화재 비로써 1973년 봉곡서원 외삼문 밖 비림(碑林)에 옮겨 세웠다. 
그 후 2017년, 하영수 원장이 봉곡서원과는 관련이 없는 ‘비’라며 논산시에 이전을 요청하여, 시에서는 황화정3리 노인정을 지을 때 임시로 뜰앞에 옮겨 세워 놓은 것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향후 원황마을(현 봉황마을)인 선샤인랜드 동쪽 주차장 주변의 옛 황화정 터를 복원하고, ‘황화정-비’를 원래의 자리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또한 ‘황화정-비’는 문화재의 가치가 충분한 옛 ‘비’로써 논산시는 고증을 거쳐 문화재 등록을 서둘러 우리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보존하는데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본 기사를 작성하는데 소중한 자료와 조언을 해주신 박영록 전 은진향교 전교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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