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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서천의 명소를 찾아

문헌서원에서 만난 인물

2023.08.19(토) 16:53:24 | 춘당 (이메일주소:yosaebi45@daum.net
               	yosaebi45@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금강의 하구둑을 비롯하여
아홉 개의 아름다운 절경지만을 골라 선정한 【서천 9경을 안고 있는 서천(舒川)은
바다와 강, 그리고 산과 들이 적당히 어우러진 살기 좋은 고장입니다.
지역마다 특색있는 절경지가 있으며 푸근한 인심도 넉넉한 서천에서
 마량리 동백숲이나 춘장대 해수욕장, 국립 생태원, 한산 모시마을은
이미 한 두번씩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신성리 갈대숲과 문헌서원, 유부도, 장항송림산림욕장은 전혀 가 본적이 없기에
이번 여행에는 유부도를 뺀 나머지 네 곳을 둘러 보기로 했습니다.

일찌감치 장항 송림산림욕장 탐방은 끝을 내고
다음 두 번째 행선지로는 「신성리 갈대밭」으로 정했습니다
시기가 갈대꽃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은 아니지만 방향이 문헌서원에서 멀지 않고
도중에 한산모시관도 오랜만에 들려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장항 시내를 거쳐 하구둑을 통과한 후 화양면을 지나는 약간 긴 드라이브를 하면서
 금강이 앞 내를 이루고 있는 한산면의 「신성리  갈대밭」마을로 달려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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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구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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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리 마을의 괴목과 정자

 

허나 역시 시기를 잘못 선택한 탓에 둑방 밑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신성리갈대체험관'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갈대 사이를 걸을 수 있는 데크길은
햇볕이 너무 강렬하여 들어가 볼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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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리 갈대 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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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배우들(송강호, 이영애,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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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편은 익산의 웅포 나루

별 수 없이 다시 차를 돌려 한가한 한산(韓山) 시내로 들어와
이른 점심을 먹은 후 새로 복원된 '주교성'을 잠시 훑어 본 후
성의 바로 윗 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한산 모시관을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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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성

서천의 직물 명품인 세모시로 명성을 얻은 한산세모시관에는
이런 안내문을 읽어 볼 수 있었습니다.

《품질이 우수하고 단아, 청아한 멋이 있어 모시의 대명사로 불린다
'세모시'는 가느다란 올로 만든 모시라는 뜻으로
백제 시대부터 1,500 여 년에 걸친 오랜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2011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에 '한산모시짜기'로 등재되어 있다》

모시는 뭐니 뭐니 해도 여인네들의 질곡된 삶을 떠오르게 하는 전통 생활의 유산입니다.
모시를 베어다 솥에 삶고 태모시를 만들어 실을 잣고 한올 한올 베틀질을 하여
고운 옷감을 만들어 내던 여인네들의 고된 손길이 없었다면
아마 전통에 앞서 일상적인 생활조차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정도로
세모시는 여인네들의 손길과 숨결이 배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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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모시관 입구

 

이미 이 곳은 여러번 발걸음을 했던 곳이라 세세한 내부 구경은 생략하고
대충 분위기만 느끼는 외관만을 둘러 보는 걸로 구경을 마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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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모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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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모시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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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구 전시실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 제 1호 한산 세모시짜기의 기능 보유자인
박미옥 여사는 모친이신 고 나상덕 선생의 장녀로 태어나
각종 모시짜기 기능대회에서 입상을 하였고
2018년 한산세모시짜기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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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옥 모시짜기 기념관

모시관 구경을 마친 후 고개를 넘어 이번에는 고려말의 대학자이며 
고려 삼은(三隱) 으로 꼽히는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가정 이곡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헌서원」을 찾았습니다.

문헌서원은 1611년(광해군 3)년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賜額) 서원이 된 곳입니다.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이색 선생 영당 뒤의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장관으로 소문이 난 곳이지만,
안타깝게도 부실한 관찰력 때문인지 배롱나무 꽃은 관상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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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으로 들어가는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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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연못과 사각 정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아버지 가정 이곡과 어머니 함창 김씨 사이에서 1328년 
경북 영덕군 영해읍 괴사리 호지 마을에서 태어난 선생은
1341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1348년(충목왕 4)에 원나라에 건너가 성리학을 연구 하였다
1352년(공민왕 1)에 전제(田制) 개혁, 국방 개혁, 교육 진흥, 불교 억제 등을 건의 하였고
1367년 대사성이 되어 성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389년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그가 세력을 잡게 되자
장단, 함창, 청주 등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1395년(태조 4년)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고
이듬해 경기도 여주에서 6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그는 태조 이성계로 부터 여러 번 출사(出仕)를 종용 받았으나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원의 연못 주변에 세워진 그의 좌상(坐像)은 
문신이면서도 기개가 드높은 호걸의 모습으로 풍채가 듬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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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선생 상(牧隱 李穡 先生 像)

잔디밭 길을 따라 신도비를 바라보며 언덕을 올라가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앞에 세워진 신도비를 찬찬히 드려다 봤으나 글자를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신도비(神道碑)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무덤의 앞이나 남동쪽에 주로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이 묘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고려 말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1328 ~ 1396)의 신도비 서(序)와 명(銘)은
1405년(태종 5년)에 하륜(河崙)이 지었으나 비는 1433년(세종 15년)에야 세워졌다.
비문의 글씨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며 서예가인 공부(孔傅)가 썼다.
그 후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66년(현종 7년)에 후손들이 다시 세웠고
비문은 하륜의 찬문(讚文)과 이색의 손자 이양균의 글을 인용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음기(陰記)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를 썼다.
그 후 1904년 당초의 비문을 깎아내고 이용원이 서문을, 송병선이 명을 짓고
후손 이용직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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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 앞의 신도비

목은 이색 선생 영당
영당은 이색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그의 영정은 관복 차림과 평상복 차림이 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관복 차림만 전해지고 있으나
이도 원본이 아닌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이 영정은 관복 차림으로 1755년 조선의 화가들이 필사한 것이며
조선 초의 대학자 양촌 권근(1352 ~ 1409)이 그림에 덧붙여 쓴 화상천문이 있고
영락(永樂) 갑신(甲申)이라는 연대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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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선생 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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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집에 걸려 있는 목은 이색 영정(影幀)은 온화한 할아버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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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색의 묘는 아래 위 쌍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래에 아들 이종선의 묘를 붙여서 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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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선생 묘소
  

진수당(進修堂)
「사액 현판(文獻書院)이 걸려있는 진수당(進修堂)은
문헌서원의 원생이 학업에 정진하며 수행하던 강당이다.
서원은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후학을 교육하는 곳으로
건물의 안쪽에는 제향 공간인 사우를 두고
그 앞에는 원생을 교육하는 강당을 두었다.
이색의 묘앞 효정사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이색의 후손 이산보의 사위인 충청도 관찰사 정업과 아들 이경탁이
1610년에 고향인 서천군 한산면 고촌리로 건물을 옮겨 다시 지었고
진수당은 1611년 문헌서원이 사액 서원이 되던  이듬해인 1612년에 세워졌다.
강당의 현판인 진수당은 주역에서 나오는 진덕수업(進德修業)에서 따온 말로써
즉 덕을 쌓고 학업을 닦는다는 뜻이다.
진수당 현판의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이후 문헌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 문을 닫았고
1969년 현재의 묘역 근처로 옮겨 다시 복원하였으며
2007년 ~ 2013년 까지 서원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진수당도 세롭게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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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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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당 앞의 동재와 서재는 원생들이 수학을 하며 기거하던 생활공간인데
동재인 존양재(存養齋)는 맹자의 중용에서 나오는 존양성찰(存養省察)에서
  유래한 말로 본성을 지키며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석척재(夕?齋) 현판이 걸린 서재도 강당의 서쪽에 위치한 원생들의 생활공간이며
 현판의 의미는 주역의 건건석척(乾健夕천)에서 나온 말로
군자는 낮이나 밤이나 힘쓰고 조심한다는 뜻이다.
즉 저녁이 되어도 낮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건물은 1611년 문헌서원이 사액되던 다음 해에(1612년) 세워졌고
현판은 동춘재 송준길이 썼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서원의 원생으로 이름을 올려 군역 등의 의무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1707년 사액 서원의 원생을 20명으로 정하고
명단을 뜻하는 '교안'에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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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존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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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석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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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각이나 효정사 등은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고
담장 남쪽의 2층 누각 건물은 햇볕이 뜨거워 가까이 가 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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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에는 목은 선생이 선비들에게 이르는 말씀이 걸려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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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밖의 한옥 건물은 호텔과 식당으로 숙박을 겸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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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가옥 호텔

문헌서원 구경을 마치자 한낮이 되면서
작렬하는 뙤약볕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 위세를 떨칩니다.
구경도 좋지만 더는 햇볕에 몸을 노출 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명소 탐방은 이만 끝내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통과하는 '한마로' 길 옆에 '이하복 고택'도 눈앞에 보이지만
냉방의 차 안을 벗어나기가 두려워 그대로 귀가를 서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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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나무인 회화나무 가로수 길

짭짤한 휴가 여행은 아닐지라도 적당히 자연과 타협하며
나름 가보고 싶었던 서천의 명소들을 일부나마 돌아 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이 외에도 서천은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지방의 특산물을 비롯하여 계절 음식도 유명한 곳이 많습니다.
특히 한산 소곡주는 '앉은뱅이 술'로 한 병 구입하고 싶었지만
금년부터 단주를 실천하고 있어서 아쉽게 체념을 해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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