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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능사, 백제 성왕을 위해 세운 사찰

무령왕 서거·성왕 즉위 1500주년, 찬란한 백제 역사 속으로 19)부여 능산리 사지

2023.07.16(일) 23:37:16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부여 능산리사지 북서쪽에서 내려다 본 전경.

▲ 부여 능산리사지 북서쪽에서 내려다 본 전경.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지난번 우리는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오늘은 금동대향로를 품었던 부여 능산리 절터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저기 보이는 곳이 바로 능산리 절터인데요. 보시면, 부여왕릉원(능산리 고분군)과 백제 수도 사비성을 둘러싼 나성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요. 이 사찰은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었다고 해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것은 절터 중앙부 목탑 자리에서 출토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일명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답니다. 국보로 지정된 이 사리감은 돌로 만든 부처의 사리(유골)를 담은 그릇인데, 567년(창왕 13) 창왕의 여동생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고 새겨 있어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왕은 위덕왕의 이름이에요. 그러니 사리감이 확인된 이 사찰은 위덕왕대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능산리 절터는 왕릉원 옆에 있어 조상의 명복을 빌던 사찰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럼, 이 사찰은 위덕왕과 그의 여동생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사찰은 백제시대 당시의 정확한 사찰명을 알 수 없지만, 지역명이 담긴 능산리 절터로 불리기보다, 조상의 명복을 빌던 사찰의 성격을 반영한 능사(陵寺)로 부르면 좋을 것 같아요. 이 능사는 부여 시내에 있는 정림사지와 같이 중문, 목탑과 금당이 일직선이 있는 동일한 형식을 지니고 있어 비교하면서 보시면 재미있답니다. 이 능사는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서 당시 백제시대 사찰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꼭 한 번 방문해보세요.

참, 이 절터를 발굴할 당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해요. 그 출토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데, 저는 그 중 나막신이 출토된 것이 아주 흥미로웠어요. 이 백제 나막신은 일본 나막신인 게다와도 비슷하답니다. 이것은 백제와 당시 일본인 왜와 문화적으로 가까웠다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어요. 또 나막신 뿐 아니라 목재로 만든 접시, 빗, 자, 숟가락, 젓가락, 수레바퀴 편 등이 출토되었어요.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곳이 발굴 당시 거의 물웅덩이였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그런지 나무들이 썩지 않고 진흙 속에서 1300년을 견디었답니다. 무척 다행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이것이 다 섞어서 사라졌다면, 백제인들이 밥을 먹던 숟가락, 젓가락, 접시의 모습은 전혀 알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머리 빗던 빗은 물론 아까 말씀드린 나막신도 볼 수 없었겠지요. 이 능사에서는 목간도 많이 출토되었어요. 목간은 종이가 귀했던 백제시대에 글을 썼던 나무 조각이랍니다. 능사에서 발견된 목간은 장부의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쌀이나 물품을 출납 등을 엿볼 수 있다고 해요. 이렇게 능사, 능산리 절터는 1300년 동안 백제금동대향로는 물론 당시 백제인들이 생활용품까지 간직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다시 돌려준 소중한 장소입니다.
/이경복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내포문화진흥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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