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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충청도 최고 갑부 김갑순 토지개혁에 빈털터리”

격동의 충남 100년 - 김갑순과 반민특위

2023.07.16(일) 23:25:38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장면.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장면.


반민특위 조사기록과 김상덕 위원장 도장. /사료로 배우는 민주화운동

▲ 반민특위 조사기록과 김상덕 위원장 도장. /사료로 배우는 민주화운동




1948년 반민특위 김갑순 구속
친일행각 조사하던 김명동
비리에 연루 반민특위 흐지부지

이승만 대통령 토지개혁 시행으로 
재산 몰수 당해 “민나 도로보데스”



1945년 해방이 되자 김갑순은 앞으로 닥쳐올 죄 값을 예견하고 전재민(戰災民) 구호주택 100가구를 지어 전란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해 주었다. 자선사업으로 정상을 참작 받으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국이 조사해 보니 20가구만 구호 주택으로 분양했고 80가구는 개인적으로 이리저리 처분한 것이 밝혀져 비난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1948년 시행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김갑순을 친일 반역 행위자로 체포 구속 시키게 된다.

충남도 평의회 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그리고 미국과 전쟁 지원을 위해 일제에 국방헌금을 기증한 행위 등이 죄목으로 열거되었다. 

특히 당시 충남 연기군 금남면에 있던 민족종교 금강대도 단군성전을 강제 철거한 목재로 역대 조선총독열전각을 지어 일제에 아첨을 한 것도 열거 되었다.

충청도최고갑부김갑순토지개혁에빈털터리 1


일제는 금강대도가 일제의 신사 참배와 일본 불교와의 통합을 거부하고 단군을 섬기는 것에 크게 노하여 탄압을 가하였는데 급기야 일본 경찰은 단군성전을 강제로 헐어 버리고 간부급 신도 63명을 공주, 대전, 조치원 경찰서 유치장으로 분산 수용했다. 이들 신도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 7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가혹했다. 이렇게 헐린 단군성전 목재는 김갑순의 손에 넘어가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짓기도 하고 유성호텔의 전신, 온천장을 건축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굳이 김갑순이 이 목재를 탐낸 것은 금강대도가 단군성전을 지을 때 강원도 태백산 일대에서 좋은 나무만 벌채하여 뗏목으로 운반해 왔고 지붕의 기와 역시 특별히 고안하여 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대도에 대한 탄압도 김갑순이 뒤에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6 · 25때 이 건물은 폭격으로 불타 버렸다. 어쨌든 이렇게 체포된 김갑순은 국회 안에 설치된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조사위원 중에는 공주 출신 김명동 의원이 가장 집요하게 김갑순의 친일행각을 물고 늘어졌다. 

김명동 의원은 일제때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발기인 34명 한 명으로 활동할 만큼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같은 공주 출신이면서 극과 극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반민특위에서 운명적으로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김명동 의원이 뜻밖에 비리 사건으로 수사를 받게 되자 김갑순 조사에서도 동력을 잃고 만다. 그런데다 1949년 일부 국회의원들이 북한 남로당과 접선하여 미군 철수와 남북 통합정부수립을 추진한 소위‘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했다.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13명의 의원들이 검거되었는데 특히 반민특위 소속 소장파 의원들이 포함되었다. 

그러니 반민특위 활동이 제대로 될리 없었고 흐지부지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반민특위는 활동시기가 경과되면서 자동 폐기되었고 김갑순 역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요란하게 출범한 반민특위였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4명에 그쳤으며 그나마 6·25가 발발하자 그대로 석방되었다. 김갑순 역시 운이 좋았다 할 것이다. 

김갑순은 그 후 자신의 친일행위를 파고 들었던 김명동 의원에 대한 반감으로 국회의원 선거 때 공주 갑, 을 두 곳에서 아들과 손자를 각각 출마시켰다. 김명동 의원을 낙선시킬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선거자금을 쓰고도 아들과 손자 모두 선거에 패배했다. 대한국민당 후보로 당선된 김명동 의원은 당선되자 마자 그동안 수사를 받아 오던 혐의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는 등 많은 수난을 겪는 가운데 6 · 25전란으로 사법적 절차가 중단된 채 세상을 떠났다. 정말 격동의 세월이었다.

6·25 전란은 공주에도 광풍이 몰아 쳤다. 7월 12일 공주의 상징인 금강철교가 폭파되고 많은 우익 인사가 검거되는 등 희생을 겪었다. 김갑순에 대해서도 예외일 수가 없다. 특히 인민군들은 남한의 지주계급에 대해서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하여 철저한 응징을 했다. 그런데도 김갑순은 살아 남았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왜 김갑순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평소 자신에 관해 기록을 남기지도 않는 데다 유언도 없어 정확하게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지역민들 사이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김갑순 역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 되었다는 것이다. 전국에 1,000만평이나 되는 토지를 소유한 대 지주계급이니 인민재판의 결과는 뻔했을 것이다. 

그런데 반민특위에서 친일행위로 체포되었으나 살아 났듯이 김갑순은 인민재판에서도 살아 났다. 그 이유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가장 유력한 것은 당시 인민재판을 주관하던 인민군 장교가 김갑순의 머슴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김갑순은 머슴들, 그리고 소작농에게 평소 후하게 대해 주었다는 것으로 운좋게 그 아들을 만난 것이다. 

김갑순은 1961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대전시내 40%땅을 소유하고 전국에 1,000만평을 소유했던 충청도 최고 갑부였지만 떠날 때는 빈손이었다.

사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시행한 토지개혁으로 많은 땅을 잃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상속세를 낼 현금이 없어 대지 7,000평, 밭 2,700평, 논 1,300평, 임야 182만평, 주택 721동을 현물로 내야했고 많은 재산도 풍비박산이 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전에 자주 했다는 일본말 ‘민나 도로보데스(みんな泥棒です, 모두가 도둑놈)’가 1982년 MBC에서 드라마로 방송됐을 때 많은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어려움에 부닥칠 때 마다 현금이나 황금 명함이면 다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체득한 것이 ‘민나 도로보데스’일까?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김갑순- 어떤 면에서는  격동의 충남 100년에 전설적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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