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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교도소 심부름꾼에서 대전 땅 절반 소유 땅부자로

격동의 충남 100년 - 충청 최고 갑부 김갑순

2023.07.07(금) 08:06:36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대전 유성온천 호텔 전경. 대전 유성온천 사진엽서이다. 유성온천호텔은 김갑순이 유성 최초의 온천공을 발굴하면서 1917년 유성온천호텔의 전신인 승리관으로 시작된 곳이다. 유성온천호텔은 1917년 당시 36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

▲ 대전 유성온천 호텔 전경. 대전 유성온천 사진엽서이다. 유성온천호텔은 김갑순이 유성 최초의 온천공을 발굴하면서 1917년 유성온천호텔의 전신인 승리관으로 시작된 곳이다. 유성온천호텔은 1917년 당시 36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


김갑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 김갑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교도소 심부름하다 동헌 일자리 구해
관찰사 찾은 선비…훗날 호조판서 
인연 덕분 벼슬얻어 24세 공주군수

부동산으로 눈 돌리고 땅 사들여
대전의 땅 50% 1000만 평 소유


‘격동의 충남 100년’에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공주 출신 김갑순(金甲淳)도 그 중의 한 사람. 친일파의 거물, 충청도 최고 갑부, 부동산 재테크의 1인자, 그리고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등등, 그의 이름 앞에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김갑순은 많은 이야기거리를 제공한다. 물론 그에 대한 이야기도 딱히 정해진 것이 없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전해 오는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갑순은 1872년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공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3세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시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취업을 한 곳이 공주 관찰사 산하에 있는 전옥(典獄)의 사환.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공주 교도소에서 간수도 아닌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은 하지만 매일 죄수들 속에 생활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남매를 맺고 있는 여인이 관찰사의 애첩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있었다. 김갑순은 그 여인을 친누나처럼 따랐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관찰사의 애첩에게 관찰사가 집무하는 동헌에 일자리 좀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김갑순의 인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동헌 청소에서부터 관찰사의 신발 정리까지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 마침내 관찰사는 그에게 물품을 출납하는 열쇠까지 맡길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하루는 관찰사가 출타 중인데 허름한 차림의 선비가 찾아왔다. 하지만 관찰사가 부재중이라 크게 실망하고 발길을 돌리려는 선비에게 김갑순이 물었다. “관찰사가 오시면 무엇이라 여쭐까요?” 그러자 선비는 “관찰사는 오랜 친구인데 내 딸이 결혼을 하게 되어 도움을 청할까 하고 왔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 김갑순은 얼른 창고문을 열고 비단 한 필을 꺼내다 선비에게 안겼다. 선비는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김갑순의 간절한 청에 비단을 받아 들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고서 얼마 후 그 선비가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지금의 재무장관이다. 호조판서가 된 그 선비는 공주의 김갑순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해 서울로 불러 들여 마포 세관의 검수관으로 발령을 냈다. 당시는 비행기가 없어 선박으로만 수·출입이 가능했는데 용산에 있는 마포가 센터 역할을 했다. 따라서 마포의 모든 수출·수입품은 김갑순의 손에 의해 관세가 결정되었고 여기서 그는 많은 돈을 벌어 공주와 대전 등에 땅을 사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호조판서를 동원하여 고향 공주군수 운동을 하였다. 조선 말기에 조정이 극도로 부패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때라 김갑순으로서는 군수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6년 불과 24세의 김갑순은 공주군수가 되어 보란 듯이 부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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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의 죄수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관찰사 심부름이나 하던 김갑순, 교육이라고는 받아 본 적도 없는 김갑순, 그러나 그는 양반의 도시라고 하는 공주를 다스리는 수령이 된 것이다. 여기에 끝나지 않고 김갑순의 벼슬 행군은 계속된다.  공주군수를 시작으로 임천군수, 부여군수, 노성군수, 김화군수(강원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양군수를 역임했으니 한번 하기도 어려운 군수를 6곳이나 거쳐갔다. ‘군수 사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행정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일까? 매관매직의 산물일까?  그는 군수로 부임하면 제일 관심을 갖는 게 부동산이었다. 구 한말과 일제식민지 초기, 그가 발견한 것은 곳곳에 ‘눈먼 땅’이 산재해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그 시절에는 자동차나 기차 같은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지방 곳곳에 말과 마차를 이용하는 역(驛)을 두고 있었다. 예산의 신례원, 경기도의 장호원, 이태원 등이 그것인데 중앙 관아의 공문을 지방에 전달하거나 벼슬아치의 지방 행차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큰 역을 말을 30마리 이상 보유하는 역도 있었다. 그러나 역 제도가 없어지면서 역이 소유하고 있던 땅은 소유권이 애매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구식 체제가 바뀌고 새로운 체제가 되면서 이와 같은 눈먼 땅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고 김갑순은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동산은 굴리면 굴릴수록 눈사람처럼 불어나는 특성이 있다. 김갑순의 부동산은 그렇게 계속 늘어났고 공주 사람이면서 대전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를 읽을 줄 아는 그는 언젠가 대전에 큰 기회가 올 것이라 예견했던 것이다. 1930년대 대전읍 면적은 1,907,400㎡(57만 8000평)이었는데 김갑순 소유의 땅은 22만 평이나 되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대전 땅 50% 가까이를 소유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전에서는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대전을 포함한 그 무렵 김갑순 소유의 땅은 3300만㎡로 1000만평에 이르러 충청도 최고의 갑부로 올라선 것이니 엄청난 축재를 한 셈이다. 물론 그의 축재는 기적이 아니라 부동산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수완이 이루어 낸 것이다. 한 사람이 1000만평의 땅을 소유하다니… 이와 같은 기록은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기록이 아닐까? 지금도 대전지방법원이나 공주법원에서 토지관계 소송이 제기되면 당초 소유주로 김갑순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이 땅에 남긴 발자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은 무한정 축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단행된 농지개혁에 의해 많은 땅을 잃었으며 그리고 1953년의 화폐개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변평섭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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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순 선정비. /디지털논산문화대전  충남도 논산시 상월면 신충리에 있는 근대 개항기 노성군수 김갑순의 선정비다. 노성군수 김갑순 선정비로는 갑진년에 건립한 청덕선정비와 애민청덕선정비가 있다. 노성군수 김갑순이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며 선정을 베푼 것을 치하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 김갑순 선정비. /디지털논산문화대전
충남도 논산시 상월면 신충리에 있는 근대 개항기 노성군수 김갑순의 선정비다. 노성군수 김갑순 선정비로는 갑진년에 건립한 청덕선정비와 애민청덕선정비가 있다. 노성군수 김갑순이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며 선정을 베푼 것을 치하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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