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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북한군 우익인사·공무원·성직자 무차별 고문 학살

격동의 충남 100년 - 노동당 충남도당 66일 天下

2023.06.16(금) 15:36:0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거룩한말씀의수녀회성당(구 목동성당) 전경. /문화재청 북한군은 당시 대전 목동성당과 수도원을 접수하여 우익인사들과 관련자들을 수용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성직자와 신도들도 포함되어 피살당하였다.  거룩한말씀의수녀회성당(구 목동성당)은 1919년 천주교 대전 본당이 만들어진 후 1921년에 지은 대전 최초의 성당이다. 6·25전쟁 당시 선교사와 양민 수백 명이 학살된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거룩한말씀의수녀회성당(구 목동성당) 전경. /문화재청
북한군은 당시 대전 목동성당과 수도원을 접수하여 우익인사들과 관련자들을 수용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성직자와 신도들도 포함되어 피살당하였다. 거룩한말씀의수녀회성당(구 목동성당)은 1919년 천주교 대전 본당이 만들어진 후 1921년에 지은 대전 최초의 성당이다. 6·25전쟁 당시 선교사와 양민 수백 명이 학살된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도당 산하 정치보위부 설치하고
대전 목동성당을 사무실로 사용
우익인사 수용하고 고문·피살

대둔산 거점으로 빨치산 활동
국군, 경찰 등 토벌작전 전개 


7월 21일 대전을 장악한 북한군은 충남도청에 노동당(공산당) 충남도당을 설치하고 위원장에는 남충렬이 임명되어 충남도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남충렬의 본 이름은 박우현이었는데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남충렬로 바꾸었다.

그는 6ㆍ25전부터 충남을 무대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이어 북한군을 따라 남침 대열에 참여했는데 전쟁 시작 전부터 평양에서 충남 책임자로 내정된 것이다.

남충렬은 도당 위원장이 되자 공주, 천안 등 충남 도내 시ㆍ군 행정을 담당하는 인민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이와 별도로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내무서도 출범시켰다.

또한 도당 산하에 악명 높은 정치보위부를 설치했는데 사무실은 대전시 목동에 있는 목동 성당과 수도원을 사용했다. 이처럼 종교 시설을 강제로 접수한 것은 미군 폭격기가 종교시설에 대해서는 폭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군우익인사공무원성직자무차별고문학살 1



정치보위부 위원장은 대좌(대령) 계급장에 권총을 가슴에 차고 다니는 등 위세가 당당했다고 한다.

정치보위부에는 보안과, 예심과 두 과가 있어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무원이나 경찰을 지낸 사람 또는 그 가족들, 그리고 우익 인사들을 색출하는 일은 보안과에서 담당했고, 이들을 심사하고 처벌하는 일은 예심과에서 맡았다.

특히 예심과에서는 즉석에서 총살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원과 성당에는 방이 40개가 있었는데 방마다 충남 각지에서 잡혀 온 우익인사와 공무원 출신 및 그 가족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고문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렇게 하여 7월 21일부터 그들이 도주한 9월 26일까지 충남 도내에서 잡혀 온 인사가 3,119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목동 성당을 지키다 체포된 프랑스 출신의 카다르 요셉 신부, 홍성 성당 강만수 신부, 당진 성당 코르테스 신부, 서산 성당 장 콜랭 심부, 온양 성당 피에르 롤뢰 신부, 예산 성당 로베르 리샤르 신부, 천안 성당 폴리 신부, 합덕 성당 필립 페랭 신부, 금사리(부여) 몰리마트 신부 등 10명의 신부가 있었다. 평신도 회장들도 상당수 체포되었다.

북한군들은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면 이들 신부들은 밖에 내보내 옷을 벗어 흔들도록 했다. 폭격을 피하기 위해 신부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한 것이다.

얼마 후에는 전라도 광주교구장 P.브레난 신부와 목포의 T.쿠삭 신부도 끌려와 이곳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이들 두 신부는 안타깝게도 곧 총살되었다.

목동 성당의 카다르 신부와 온양 공세리 성당 요셉 신부는 북으로 압송되어 많은 우익 인사들과 ‘죽음의 행진’을 하다 평안북도 중강진에서 혹독한 추위와 기아에 지쳐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남아있던 신부들도 우익 인사들이 죽임을 당할 때 같이 희생되었다.

이들 남로당(공산당)들이 우익 인사들에 잔혹한 죽음을 가한 것은 UN군이 인천 상륙을 감행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의 야만적 살인 행위는 세계 언론에도 보도되었는데 총살 110명, 우물에 산채로 빠뜨려 죽게 하거나 구렁에 생매장한 것이 90명이나 되었다.

국군이 수복했을 때 산 언덕에서 600여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성당 지하실에도 10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얼마나 잔악무도한 만행인가!

조선노동당 충남도당위원장 남충렬은 북한군이 패퇴하기 시작하자 9월 25일 노동당 관련 모든 서류를 파기하고 대둔산으로 잠입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군의 대둔산 토벌 작전에서 2,200명을 사살하고 1,000여 명을 생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남충렬이 거느린 빨치산이 3,000명 이상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그는 계룡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계룡산은 독립된 산세여서 포위되었을 때 도주로가 없어 대둔산을 택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빨치산 활동으로 악명이 높았던 이현상은 남부군 총사령관이 되어 지리산을, 남충렬은 대둔산을 거점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김일성이 직접 라디오를 통해 내리는 지령에 따라 철저히 움직였다.

남충렬은 대둔산에 본부를 차리고 산하 부대를 대전 부대, 공주 부대 등 조선노동당 충남도당 위원장 밑에 있는 시ㆍ군 위원회 이름을 부여했고 더 규모가 큰 부대는 백두산 부대, 압록강 부대 등 북한에 있는 산과 강 이름을 붙였다. 심지어 공병부대, 의무부대를 둘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특히 부대 이름을 충남 도내 시ㆍ군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가 충남도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려는 심리적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대둔산 승전기념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아카이브

▲ 대둔산 승전기념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아카이브



남충렬의 대둔산 빨치산들은 낮에는 산속에 숨어있다가 밤이면 논산, 강경, 금산, 공주, 벌곡, 양촌에 나타나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강탈해 가는 등 행패가 막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관공서, 경찰서를 습격하여 치안을 교란시켰다. 이와 같은 만행은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도 6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리 군과 경찰의 끈질긴 토벌작전에 빨치산의 활동도 위축되기 시작하였는데 1950년 11월 국군 제9사단이 토벌 작전을 벌인 것을 비롯하여 대둔산지구 전투경찰대 등 400회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특히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1953년 9월 17일 저녁 8시 지리산에서 우리 군에 사살됨으로써 빨치산의 조직은 점차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1월 2일 대둔산에서 남충렬 위원장도 최후를 맞이하면서 조선노동당 충남도당이 막을 내렸으며 충남 지역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 평화의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국군과 경찰, 의용 경찰, 민간인 등 1,300여 명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삼가 이들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변평섭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북한군우익인사공무원성직자무차별고문학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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