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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가슴 아픈 역사…북한군 막기 위해 금강교 폭파

격동의 충남 100년 - 6·25, 天安 전투와 금강사수작전

2023.06.05(월) 15:31:2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6.25 전쟁 당시 미군이 금강 방어를 위하여 1950년 7월 12일 충남 공주에서 금강철교를 폭파하는 광경.

▲ 6.25 전쟁 당시 미군이 금강 방어를 위하여 1950년 7월 12일 충남 공주에서 금강철교를 폭파하는 광경.


파괴된 금강철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 파괴된 금강철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스미스 부대가 로켓포(바주카포)를 쏘고 있는 모습.

▲ 스미스 부대가 로켓포(바주카포)를 쏘고 있는 모습.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  /스미스 평화관

▲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 /스미스 평화관



1950년 7월 8일 천안전투 
마틴 대령 직접 로켓포 들고 
북한군 전차 맞서 싸우다 전사

금강 전선 구축 북한군 남하 방어
1950년 7월 12일 금강철교 폭파
금강 사수에도 북한군 막지 못해


“북한군은 우리를 보면 도망칠 것이다”

미 24사단 21연대 스미스 부대 장병들은 그렇게 적을 과소평가 했다.

1950년 7월 2일. 충남도청에 설치된 ADCOM (미 지상군 지휘본부)에서 처치 준장과 전투에 임할 스미스 부대의 스미스 중령이 작전회의를 했는데 불과 1시간 만에 회의를 끝낼 정도로 북한군을 무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 종군기자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퍼렌버그의 저서 ‘이런 전쟁’에 잘 나타나 있다.

스미스 중령은 가볍게 작전회의를 마치고 충남도청에서 나와 406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전선으로 향했다.

그들이 오산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하고 전투태세에 돌입했을 때 나타난 북한군은 생각했던 그런 군대가 아닌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군에는 없는 탱크가 괴물처럼 지축을 울렸고 병력 또한 북한군 제4사단과 107 기갑연대 등 3만 여명. 그러니 7월 5일 첫 접전에서 미군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가 되는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독일군과 싸워 이긴 스미스 부대이지만 괴물 같은 탱크 앞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병력의 30%를 잃은 스미스 부대는 천안으로 후퇴하고 이곳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 제34연대가 천안으로 달려와 스미스 부대와 합류했는데 역시 탱크가 없어 전투에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연대라고 하지만 병력은 667명에 연대장은 로버트 R 마틴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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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천안 박물관이 있는 곳 일대에 진지를 구축한 마틴 대령의 34연대는 7월 7일부터 7월 9일까지 천안 사수 작전을 벌였다. 천안시가는 불바다가 되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마틴 대령은 물밀듯 조여오는 북한군을 향해 부대를 독전하는 한편 직접 바주카포를 어깨에 메고 북한군 탱크 사냥에도 나섰다.

그러는 한편 사단장 딘 소장에게 맥아더 사령부에 대전차포를 급히 보내줄 것을 요구하도록 했다.

공군 지원도 요청했으나 장마철 비 때문에 제대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7월 8일 오전 8시. 마틴 대령은 지금 천안시 구성동 네거리에 있는 민가에 숨어서 부관 한 명과 함께 북한군 탱크 사냥을 하던 중, 북한군의 포격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연대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14시간 만에 48세의 나이로 최후를 맞은 것이다.

한국전에서 미군 연대장이 전사했다는 것은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충남도청 ADCOM 지휘소에서 마틴 대령의 전사 소식을 접한 처치 준장은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미국은 마틴 대령에게 십자 훈장을 추서했고 천안시는 마틴 대령이 전사한 구성동, 삼룡동을 잇는 거리를 ‘마틴 거리’로 명명하여 그의 희생을 기리고 있으며 삼거리 초등학교 옆 마틴 공원에서는 그가 전사한 7월 8일 추모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90년 6월에는 마틴 대령의 딸 제인 여사가 아버지가 전사한 현장을 방문하여 감동을 주었고 천안시는 그에게 명예 천안 시민증을 수여했었다.

연대장을 잃은 미 제34연대는 당시 연기군 전의면과 전동면 사이를 가로지르는 개미고개로 후퇴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곳은 산악지대에 둘러싸여 있고 경부선 터널이 길게 뻗쳐 있어 전투를 벌이기에는 매우 불리한 지형이었다. 더욱 미 제34연대는 산악전의 경험이 없어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결국 이곳에서 517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대한민국을 지켜주기 위해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미군은 금강에 전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하고 새로 연대장이 된 멜로이 대령이 전투를 지휘했다.

멜로이 대령은 1962년 육군 대장이 되어 UN군 사령관으로 우리나라에 부임하여 2년간 복무하기도 했다.

24사단장 딘 장군은 신탄진에서 공주에 이르는 방어선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금강에 놓여있는 모든 교량을 파괴하고 강 위에 떠 있는 나룻배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7월 12일 공주의 상징인 금강철교가 폭파되는 것을 비롯하여 신탄진에 있는 경부선 철교, 연기군 대평리의 교량 등을 모두 폭파했다.

공주 금강철교는 7월 13일 다시 2차 폭파를 하여 적으로 하여금 전혀 이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어 이영호가 이끄는 북한군 제3사단, 이건무가 이끄는 제4사단이 대평리를 중심으로 미군의 금강 전선을 압박해 왔다.

멜로이 대령이 이끄는 미 제34연대와 21연대가 필사적으로 금강을 건너려는 북한군을 공격하여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으며 한때는 북한군이 일시 후퇴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7월 15일 밤 북한군은 금강을 건너는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미군의 공격에 수많은 북한군이 강물에서 죽어갔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병력을 총알받이로 투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7월 16일 새벽 북한군이 금강을 건너 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연대장 멜로이 대령마저 부상을 입고 후송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24사단장 딘 장군은 어떻게든 금강을 사수하려고 했지만 3만 병력에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대항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이렇게 금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북한군은 신탄진에서 계족산 능선을 따라서, 그리고 공주 금강을 건넌 부대는 계룡산 방향으로, 대평리를 건넌 부대와 합류, 대전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런 급박한 사태 속에서도 애타게 기다리는 미군의 탱크 부대 제1기갑사단은 때마침 동해를 휩쓰는 태풍으로 일본기지로부터 한국행이 늦어지고 있어 가슴을 졸였다.
/변평섭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전란 중인 천안시가지. /유엔군 초전기념관

▲ 전란 중인 천안시가지. /유엔군 초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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