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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무령왕릉 벽돌이 보여주는 대외관계

무령왕 서거·성왕 즉위 1500주년, 찬란한 백제 역사 속으로 14) 벽돌무덤

2023.05.30(화) 17:50:29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무령왕릉 벽돌무덤 서벽 입구.

▲ 무령왕릉 벽돌무덤 서벽 입구.


 

왕릉서 출토된 벽돌.

▲ 왕릉서 출토된 벽돌.



 

여러분, 무령왕릉 안을 둘러보면서 궁금했던 점 있으세요? 저기 손들고 계신 남학생! 벽에 있는 복숭아 모양의 빈 곳이 어떤 용도냐고요? 아, 그 공간을 등자리(벽감 혹은 등감)라고 하는데요. 등잔을 놓기 위해 만든 공간이랍니다. 등잔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조명이예요. 조명으로 쓰인 등잔은 백자로, 그 안에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심지가 남은 것도 있어요. 그래서 실제로 불을 밝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답니다. 최근 과학적 분석 결과 기름은 주로 유채 기름이나 들기름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재미있죠? 

또 저기 여학생! 5호분은 돌로 만들었는데, 무령왕릉은 왜 벽돌로 만들어졌냐고요? 그러고 보니까 저 충나미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설명 안 했네요. 보시다시피 무령왕릉은 수천 장의 벽돌을 쌓아 올린 벽돌무덤이에요. 무덤에는 크기와 형태, 그리고 무늬가 제각각 다른 여러 종류의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벽돌은 크게 무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무늬가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연꽃무늬 벽돌이랍니다. 

백제에서 벽돌무덤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6호분과 교촌리 고분 등 소수만 공주지역에서 확인되었어요. 그런데 5호분과 같은 돌로 만든 무덤은 백제전역에서 수천 개가 있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인들에게 벽돌무덤은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해요. 저기 전시된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는 글자를 새긴 벽돌이 보이시나요? 이 글자는 “중국 양나라 관영공방의 기와를 본보기로 삼았다”로 해석됩니다. 이 벽돌무덤은 아마도 양나라 기술자 몇 명이 백제에 파견되어 백제 기술자에게 선진 기술을 전수하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양나라에서 전수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중국 남경 연자기(燕子磯)의 양보통(梁普通) 2년묘와 대문산묘(對門山墓)가 규모나 구조적으로 무령왕릉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무령왕릉의 입지와 구조, 축조방식은 전형적인 양나라 방식입니다. 아마 백제 기술자들은 중국에서 수입된 물건은 끊임없이 모방되고 재창조하였지만, 중국 기술자가 직접 들어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부분도 있었을 거예요. 그중 하나가 벽돌 제작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령왕릉이 양나라식이라서 실망하셨나요? 여러분, 무령왕릉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결코 우리 역사에 대한 비하가 아니랍니다. 오히려 당시 백제가 이러한 선택을 하였던 원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역사적 자세예요. 흔히 중국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우리만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이 애국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답니다. 

여러분, 주위를 보세요. 나와 함께 친구들이 있지 않아요? 물론 친구들과 싸우기도 하지만, 친하게 지내잖아요. 국가도 똑같아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난번 무령왕은 일본(왜)과 밀접한 교류를 해왔다고 말씀드렸죠. 무령왕 대 백제인들은 일본(왜)과 중국(양나라), 가야, 신라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많은 문물교류를 이루었답니다. 
/이경복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내포문화진흥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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