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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도청이전 반대 항일운동으로 번져

격동의 충남 100년충남도청 公州에서 大田으로 ②

2023.04.16(일) 22:31:26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대전에 건축 중인 도청 앞에서 열린 도청 대전 이전 반대 시위 모습.                                                  /공주학아카이브
▲ 대전에 건축 중인 도청 앞에서 열린 도청 대전 이전 반대 시위 모습. /공주학아카이브

도청을 대전으로 유치하기 위해 논의 중인 대전도시계획위원들 모습.                           /충남역사문화연구원
▲ 도청을 대전으로 유치하기 위해 논의 중인 대전도시계획위원들 모습.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충청남도 도청의 이전은 1910년을 전후하여 호남선 부설 논의가 전개되면서 주로 대전 지역 일본인 거류민을 중심으로 여론이 대두하였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 이전 문제와 더불어 조선총독부 일각에서 충청남북을 합쳐 조치원에 충청도 도청을 설치해야 한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으며, 1929년에는 조선총독부 야마나시 총독의 독직사건이 여론화되는 과정에서 대전 지역 유지들의 충청남도 도청 유치 로비 사건이 폭로되었다. 




1930년 1월 17일 사이토 총독
충남도청 대전 이전 기습 발표

공주 불 지르는 등 반대 과열
대전 부동산 가격 급등 환호 


원래 충남도청을 유치하려는 움직임은 대전만이 아니라 조치원에서도 있었고 온양, 천안에서도 있었다. 한때는 조치원이 가장 유력했으나 호남선 분기점을 대전으로 빼앗기면서 힘이 빠졌다. 그런가 하면 온양에 있는 일본인들이 공주에 있는 도청을 천안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경남철도 사장인 데구찌. 그는 천안-장항간의 충남선(지금의 장항선)을 부설할 만큼 조선총독부의 신임이 두텁고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했다. 또한 온양 온천에 있는 신정관도 운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무시 못 할 존재였다.

한번은 그의 신정관을 방문한 조선총독부 제2인자 고마다 정무총감에게 온양이나 천안으로 도청을 이전해 줄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데구찌는 정무총감에게 충남의 지도를 보면 부채처럼 생겼다면서 그 부채의 손잡이가 바로 온양·천안인데 도청이 공주에 있으면 손잡이가 없어 바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천안-장항 충남선과 온양 온천의 신정관의 이익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온양, 천안으로의 도청이전 주장은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조치원이나 온양, 천안이 도청유치에 실패한 것은 대전에 있는 일본거류민들처럼 조직적이지 못했고 충청도 갑부 김갑순처럼 도청 부지를 희사할 사람이 없었던 것 등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대전의 일본 거류민들이 야마나시 총독에게 뇌물을 준 사건도 영향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전 이전도 한때 위기를 맞은 일이 있었다. 전에 있던 야마나시 총독이 대전의 일본 거류민들로부터 도청유치를 위한 뇌물을 받은 사건이 터지면서 이제 충남도청 이전은 물 건너 갔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공주에 있던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있었으며 대전의 일본인들도 거의 체념하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야마나시 후임으로 조선총독이 되어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달랐다. ‘총독이 결정한 것을 여론이 안 좋다고 취소하면 조선인에 대한 총독부의 권위가 무너진다. 권위를 잃으면 조선을 통치할 수가 없다’는 것이 사이토 총독의 주장이었다. 그러고는 1930년 1월 17일 사이토 총독은 신년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겠다고 기습 발표를 했다. 

도청이전반대항일운동으로번져 1


도청 이전비 39만5,000원도 제국의회(지금은 중의원)에 상정한다고도 했다. 옆에 배석했던 고다마 정무총감이 부연 설명을 하면서 ‘충남도 지도를 보면 부채처럼 생겼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부채 가운데 있어 바람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부채의 손잡이는 대전이 아니겠습니까?’하고 거들었다. 도청을 온양이나 천안으로 옮겨 달라며 경남철도 데구찌 사장이 주장하던 논리를 이렇게 바꾸어 주장한 것이다. 사이토 총독의 이와 같은 폭탄발언이 있자 대전은 환호성이 터졌고 공주는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당시 충남지사 유진순이 출근하는 길에 공주 주민들이 몰려가 흙을 뿌리며 당신은 배신자라고 외치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 졌다. 

그런데 이들 항의 군중을 주동한 사람은 공주에 와서 잠사업을 하던 일본인 마루야마였다. 결국 공주 소방서에서 소방차가 출동하여 호수로 물을 뿌려 군중을 해산시켰고, 도지사 관사(현재 공주 세무서 자리)에 대한 경찰의 경비도 강화되었다. 그래도 공주 주민들의 저항은 가라앉지 않고 일본인 마루야마가 뒤로 물러가고 김영배씨가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다. 김영배씨는 한국은행총재, 재무부장관, 국회의원으로 국회 외무위원장을 지낸 공주 출신 김세련씨의 부친이기도 하다. 이처럼 격열한 공주 주민들의 도청이전 반대투쟁은 점차 항일운동으로 까지 발전했다. 밤에는 공주에 있는 봉황산 정상에서 누군가 횃불을 밝혀 경찰을 긴장시키기도 했으며 공주가 고향이면서도 도청의 대전 이전을 위해 땅까지 희사한 김갑순 소유 극장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반대로 대전은 축제분위기였다. 사이토 총독이 도청이전을 발표한 날 대전에서 발행되던 호남일보는 호외를 발행할 정도였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평균 한 평에 2~3원 하던 것이 5~6원, 그러니까 100% 이상 인상한 것이다. 그러니까 김갑순의 경우 도청 부지로 많은 땅을 희사했으나 대전으로 도청을 유치하게 됨으로써 그의 부동산 가치도 크게 오르는 바람에 오히려 엄청난 수익을 보게 된 것이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재테크’의 달인이 된 셈이다. 그런데 순조롭게 진행되던 도청이전은 뜻밖의 암초에 부딪히게 된다.

동아일보 1931년 1월 23일자에 실린 충남도청 이전에 관한 내용이다. 지방논단이라는 항목에서 ‘도청이전’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려 있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 배경과 그 이유를 기재하고 그에 따른 논평을 기록하였다. 대전이 일본인 중심의 도시라는 내용일 눈길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동아일보 1931년 1월 23일자에 실린 충남도청 이전에 관한 내용이다. 지방논단이라는 항목에서 ‘도청이전’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려 있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 배경과 그 이유를 기재하고 그에 따른 논평을 기록하였다. 대전이 일본인 중심의 도시라는 내용일 눈길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31년 7월 충남지방에 심각한 폭우로 370명이나 목숨을 잃었고, 4211가구가 파손되는가 하면 농경지 유실 또한 상당했다. 그러자 도청이전비로 책정된 예산을 수해복구에 전용하라는 총독부 지시가 떨어지는가 하면 일본 제국의회도 충남도청의 이전 안을 부결시킨 것이다. 그러자 또 한번 상황은 역전되었다. 김영배, 유시종, 김기태, 오경원 등 도청이전반대 투쟁위원의 지도부를 비롯 공주 주민들은 환호했고 이제는 다시 도청이전 문제가 거론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대전에는 일본 귀족으로서 일본 정계에 영향력이 컸던 시라이시 데스지로라는 거물이 있었다. 비록 일본에서 여자 문제로 말썽을 일으켜 대전에 은거해 있지만 아직도 그의 실력은 죽지 않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중의원에서 부결된 것도 귀족원으로 넘어 오면 다시 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 출신의 시라이시가 급히 일본으로 건너가 로비활동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귀족원은 중의원의 결의를 뒤집고 충남도청의 대전이전을 승인했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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