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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日帝, 충남도청 이전 정치적으로 악용

격동의 충남 100년 - 충남도청 公州에서 大田으로 ①

2023.04.07(금) 14:13:51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1910년대 충남도청 금남루.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1910년대 충남도청 금남루.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충청남도 도청의 이전은 1910년을 전후하여 호남선 부설 논의가 전개되면서 주로 대전 지역 일본인 거류민을 중심으로 여론이 대두하였으나, 당시 대전 지역은 공주 지역보다 인구나 도시 기반 시설 측면에서 불충분하였다. 단지 1920년대 인구 구성비에서 일본인이 공주 지역보다 대전 지역에 2배 정도 많았다. 1923년 공주 지역인구는 8304명(한국인 6548명, 일본인 1605명)이고 대전 지역 인구는 6728명(한국인 2114명, 일본인 4798명)이었다. 1925년경 경상남도 도청 이전 문제와 더불어 조선총독부 일각에서 충청남북을 합쳐 조치원에 충청도 도청을 설치해야 한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으며, 1929년에는 조선총독부 야마나시[山梨半造] 총독의 독직사건이 여론화되는 과정에서 대전 지역 유지들의 충청남도 도청 유치 로비 사건이 폭로되었다.
 

신석린 전 충남도지사

▲ 신석린 전 충남도지사




야마나시 총독, 신석린 지사 등
4인 비밀회의 이전 방침 확정

일본 아사히신문 비리 폭로로 
조선총독 파면, 한때 이전 중단


“피고는 대전 거류민단으로부터 10만원을 받았는가?” “전혀 뇌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검사의 공소장에는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달라는 청탁을 받고 대전 거류민단(일본인)으로부터 10만원이나 되는 뇌물을 챙겼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피고인을 신문했다. 1929년 11월 29일 동경 지방법원에서였다. 피고는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총독을 지낸 야마나시. 예비역 육군 대장인 야마나시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집권당 정우회 총재이며 수상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정치자금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현역 시절에도 부패 장군으로 악명을 떨친바 있어 조선의 일본 거류민들은 그가 총독으로 오는 것을 반대했는데 다나카 수상은 그대로 임명을 강행했던 것. 그 무렵 일본은 중국과 만주 진출을 위한 야욕으로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었다.

따라서 수풍 발전소, 흥남 비료공장, 철도 부설 등 굵직한 산업시설들이 활발히 들어섰고 일본 재벌들의 총독부 로비가 뜨겁게 전개되었다. 얼마나 그 상황이 치열했던지 일본의 최대 신문 아사히(朝日)신문은 ‘조선은 일본 기업들의 황금시장이 되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야마나시 총독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조선 진출 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흥남 질소비료 공장 오오끼 사장으로부터 100만원을 받은 것. 쌀 1가마에 5원일 때니까 100만원은 굉장히 큰 뇌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모은 돈은 다나카 수상에게 50% 상납하고 나머지는 만주책략기금으로 비축했으며 자신의 호주머니도 챙겼다. 야마나시 총독이 대전 거류민들로부터 공주에 있는 도청을 대전으로 옮겨 달라며 10만원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대전 거류민들을 대표하여 이런 비자금을 만드는 데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은 시라이시 데스로. 그는 일본 본국에서 귀족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으나 여자와의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고 조선으로 건너와 대전에 도피성 정착을 한 인물이었다. 충남도청 유치운동을 추진하던 시라이시 데스로 등 대전의 일본인들은 야마나시 총독을 대전에 초청하는 교섭을 벌였다. 야마나시 총독은 이들의 초청을 수락하면서 공주지역민들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1929년 3월 공주에 있는 충남도청을 공식  방문하는 형식을 취했다. 총독은 먼저 공주에 들러 당시 신석린 충남도지사로부터 도정 보고를 듣고 도청 마당에 잣나무 한 그루를 기념 식수했다. 이어 논산군도 방문, 그곳에서도 기념식수를 하고 오후 늦게 유성 온천장(현 유성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총독으로서 충남도를 시찰한 것처럼 되었지만 그 속에는 깊숙한 음모가 있었던 것. 유성 온천장에서 베풀어진 총독 환영 연회에는 일본 귀족 출신 시라이시 데스로를 비롯, 충청도 최고 갑부이며 조선총독부 참의의 벼슬에 오른 공주 출신 김갑순, 대전 방직의 가네후찌 사장 등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이들은 한결 같이 도청이 공주 산속에 있어 불편하다며 대전으로 이전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조선의 남부 중원이 텅 비어있음은 ‘조선책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이들의 주장을 들은 야마나시 총독은 “전임 데라우찌 총독께서 추진하다 중단한 도청이전은 내가 해결하겠소”하고 답변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충남도청이전정치적으로악용 1


이렇게 공식적인 연회가 끝나고 야마나시 총독은 별실로 자리를 옮겨 도청 이전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했고 이 자리에서 시라이시에 의해 뇌물 10만원이 건네진 것으로 알려 졌다. 이 자리에는 총독과 시라이시에 백작, 그리고 신석린 충남도지사와 김갑순 참의 등 4인. 이들 4인 비밀회의에서 야마나시 총독이 입을 열었다. “목적은 좋지만 도청이 들어 설 부지 구입이 문제요. 지금 우리 정부는 긴축예산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급하지도 않은 도청 옮기는데 땅을 사겠다면 허락하겠소? 조선박람회를 준비하는 데도 돈 때문에 난리인데…” 그러자 시라이시에 백작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 계신 김갑순 참의께서 제공하기로 했으니까요.”하고 대답했다. 야마나시 총독은 이 말에 활짝 웃으며 “그럼 문제는 해결됐네요. 김갑순 참의께서는 도로를 개설하는데도 사유지를 많이 회사하셨는데 감사합니다” 하며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이렇게 해서 이날 밤 4인 비밀회의는 충남도청 이전에 대한 방침을 확정지었고 야마나시 총독은 거액의 정치자금도 챙겼다.

그러나 그해 7월, 일본 아사히신문 서울 특파원이 야마나시 총독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사를 터뜨리면서 사태는 심각한 국면을 맞이했다. 총독의 비서가 구속되고 일본의 여론은 다나카 수상의 사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나카 수상은 더 버티질 못하고 사퇴했으며 야마나시 조선 총독은 파면됐다. 조선총독 가운데 파면이라는 불명예로 물러난 것은 야마나시가 유일하다. 여기에 끝나지 않고 도쿄 검찰은 야마나시에 대한 비리를 수사한 끝에 재판에 넘겼는데 육군 대장 출신이고 군 재직시절 전공을 세워 훈장 받은 것을 참작해 불구속으로 기소했다. 결국 재판 과정에서 그가 대전 거류민들로 부터 뇌물성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밝혀졌으며 이 뉴스가 전해지면서 공주 사람들은 분노하여 그가 충남도에 왔을 때 기념식수한 나무를 뽑아 버리는가 하면 유성에서 4인 비밀회의에 참석한 신석린 도지사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반면 도청 위치를 추진하던 대전의 거류민들은 크게 실망하여 숨을 죽였다. 물론 공주 사람들은 이제 도청 이전문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도청사수에 대한 긴장을 풀었다. 사실 야마나시 총독은 재판에서 기업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은 유죄가 인정되었고 대전 거류민단에게서 받은 것은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받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여론은 악화일로였기 때문에 공주 사람들은 마음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책이었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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