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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지석이 가리키는 장소, 정지산 유적

무령왕 서거·성왕 즉위 1500주년, 찬란한 백제 역사 속으로 8)무령왕과 왕비의 빈전

2023.03.27(월) 21:42:32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정지산유적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 정지산유적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힘드시죠. 무령왕릉에서 이곳까지 따라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좀 앉아 쉬시면서 기억을 되살려보죠. 무령왕릉 지석에서 서쪽에 해당하는 “申庚酉辛戎(신경유신융)”을 새기지 않고 비워 둔 이유는 무령왕릉과 빈전의 위치가 공산성을 중심으로 할 때 각기 신지(申地, 서남쪽)와 유지(酉地, 서쪽)에 해당한다고 했었고, 왕비의 지석 내용에 “거상(居喪)이 유지(酉地)에 있었다.”고 말씀드렸어요.

이 장소가 바로 유지입니다. 자, 우리 함께 찾아보시죠. 아마도 이 땅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앗 저기 건물터가 있었다는 나무 기둥과 안내판이 있네요.” 그래도 실망하지 마시고, 한번 찾아보시죠. 찾은 거 있으시면 저 충나미에게 보여주세요. 아직도 땅위에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와~~ 어떻게 찾으셨어요. 기왓조각이네요. 금덩어리는 아니지만, 이것도 소중한 보물입니다. 

백제시대 당시 기와는 왕궁, 관청, 사찰 등 매우 중요한 건물에만 쓰였답니다. 그러니 여기서 기왓조각이 보인다는 것은 이곳이 당시 중요한 시설이 있었다는 증거품입니다. 실제로 1996년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그 중요한 시설이 확인되었어요. 이곳을 정지산 유적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발견한 기왓조각은 웅진시대 기와 건물터의 흔적입니다. 이 건물터는 약 4,000평에 달하는 능선부를 평평하게 하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실시한 뒤에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설들에는 목책이 둘려 있어서 일반인의 자유로운 출입을 통제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설물은 매우 중요한 시설임이 분명하겠죠. 

이 시설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세요. 1996년 발굴조사 당시에는 정확한 성격을 모른 채 단순한 저장구덩이로 알았던 시설들이 사실은 얼음을 보관하던 얼음창고라는 점이 밝혀졌어요. 고대사회에서 얼음의 중요 용도는 더운 여름에 술을 차갑게 식히는 것과 시신이 부패할 때 나오는 냄새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기와 건물터의 용도를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겠죠. 정지산 유적은 시신을 보관했던 빈전(殯殿)입니다. 무령왕릉 지석을 보면, 무령왕은 523년 5월 7일에 사망하여 525년 8월 12일에 매장되어 3년의 공백이 있어요.  중국의 역사서인『주서』에 따르면 백제는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는다고 합니다. 즉, 삼년상을 치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무령왕과 왕비가 죽은 후 3년간 상복을 입고 애도하였는데, 그동안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이 곳에서 빈장(殯葬)하였을 겁니다. 

재미있죠. 여러분이 발견한 기왓조각 하나로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빈전이라는 역사적 사실까지 알 수 있었어요. 당시 발굴조사도 땅위에 발견된 기왓조각 하나가 계기가 되어 도로개설로 사라져버릴 뻔한 중요한 정지산 유적이 보존될 수 있었답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작은 관심을 통해 큰 흔적을 찾아가는 것이 역사입니다.   
/이경복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내포문화진흥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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