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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독립 꿈꾸던 유관순 열사의 외침

격동의 충남 100년 - 유관순과 天安아우내 만세운동

2023.03.27(월) 21:38:28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독립꿈꾸던유관순열사의외침 1

▲유관순(柳寬順)은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사애리시의 주선으로 1915년 4월에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한다. 당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추천받아 공부하게 되었으며, 1918년 3월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료 학생 6명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 탑골공원과 남대문역 등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10일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그곳 유림대표와 집성촌 대표 등과 함께 4월 1일 정오를 기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키로 모의했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일일이 나눠준 뒤,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시위 주동자로 일경에 체포됐다.
사진은 현 공주영명고교 최초건물.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스승 사애리시 선교사와의 만남
이화학당 진학 근대학문 공부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서
주민들과 “대한 독립 만세”
시위 주동자로 일경에 체포 



공주에 영명고등학교를 설립한 사애리시(원명. 엘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와 유관순의 만남은 이 땅에 엄청난 역사의 횃불을 밝히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1990년 구한말 남편 샤프 선교사와 함께 공주에 터를 잡은 사애리시는 공주에서 전염병으로 남편을 잃고도 캐나다로 돌아가지 않고 더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다. 유관순의 고향 천안 병천 용두리에 있는 매봉교회는 이와 같은 사애리시 선교사의 선교센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 교회에 다니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영리한 소녀 하나를 발견한다. 유관순이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14년 유관순을 공주로 데리고 와서 그가 세운 영명학교에 입학시킨다. 유관순은 학교생활도 충실했고 특히 영어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유관순에 대한 더큰 가능성을 발견하고 공주 영명학교에서 2년을 마친 1916년 4월 1일 이화학당(現이화여고) 3학년에 편입학 시킨다. 교비 유학생으로 학비는 면제 받았다. 이렇게 하여 유관순은 낯선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고 이화학당에 들어 온 후 점차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정신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역사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유관순은 친구 4명과 함께 학교 담장을 넘어 종로로 달려가 독립만세 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됐는데 다행히 선교사의 노력으로 곧 석방될 수 있었다. 유관순의 첫 대일투쟁인 셈이다.

독립꿈꾸던유관순열사의외침 2



조선총독부는 계속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전국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도 어쩔 수 없이 3월 13일 학교 기숙사를 나와 기차를 타고 천안 고향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3월 16일 저녁 예배에 참석한 후 교회신자 20여명에게 서울에서 벌어졌던 3·1독립만세운동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냥 있지 말고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설득했다. 이에 참석자들은 4월 1일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병천과 가까운 연기, 목천, 경기도 안성, 충북 청주와 진천까지도 참여를 유도하기로 했다. 이 지역과의 연락은 유관순이 직접 맡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 준비가 완료되면 3월 31일 밤 매봉산에 봉화불을 밝히기로 했다. 봉화불을 밝히는 것 역시 유관순이 맡았다. 이와 같이 유관순이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계몽활동을 해온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드디어 3월 31일 밤 매봉산에 봉화불이 올랐고 4월 1일 날이 밝자 여기 저기서 장꾼들이 아우내 장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우내 장터는 점점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달아올랐고 장꾼으로 가장한 참여 인원은 3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저마다 태극기를 몸에 숨기고 있었다. 마침내 오후 1시. 조인원이 서울에서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낭독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이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우렁차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곧 이어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자들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고 발포하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는 머리와 복부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어머니까지 이렇게 목숨을 잃었다. 19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부상자 또한 30여명이나 되었다. 평화롭던 아우내 장터는 금새 피바다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일단 장터를 벗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오후 4시경 다시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갔고 병천 면사무소와 우편소에 집결, 계속 만세를 불렀다. 그들 옷에는 피가 묻어 있기도 했고 일본 헌병이 쏜 총알에 맞아 구멍 난 갓을 쓴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만세 행렬은 해산되고 일본 헌병들은 26명을 붙잡아 헌병대로 끌고 갔다. 유관순 등 만세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은 모두 공주 형무소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공주 형무소는 창 너머로 유관순이 2년간 다니던 영명학교가 보이는 곳, 그 마음이 어떠했으랴. 5월 1일 열린 공주법원 1심 재판에서 유관순은 5년 조인원, 유중무에게 징역 3년이 선고됐고 김용이, 조병호 2년 6개월,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2년, 김상훈, 백정운 8개월, 김상철 6개월 등 가혹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유관순은 일본 판사에 의한 재판 자체를 거부했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우리를 재판하느냐’는 것이었다. 일본 판사는 유관순의 재판 거부에 법정모독죄를 추가로 적용하여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이후 서울복심법원에서 3년으로 형량이 낮아졌다.


유관순 열사

▲ 유관순 열사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있으면서도 기회가 되는 대로 독립만세를 외쳐 형무소 간수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옥중에서 3·1운동 1주년을 맞은 그는 그 곳에 갇혀 있는 수감자들과 비밀 연락을 하여 오후 2시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로 하여 서대문 형무소는 큰 소동이 벌어졌으며 형무소 직원들로는 손을 쓸 수 없어 일본 기마경찰대가 출동하여 겨우 사태를 진압했다.

이 때문에 유관순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였고 결국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18세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일제는 유관순의 시신을 내어 주질 않으려 했으나 이화학당 윌터 교장이 ‘세계 여론에 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하여 10월 12일에야 시신 인수가 이루어 졌다. 시신이 학교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울부짖으며 유관순을 추도했다.

10월 13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일제의 용산, 이태원 일대의 군용지 개발로 유해는 다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이 역시 자취가 없어져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지금 유관순의 고향 매봉산에 있는 묘는 초혼묘로 조성되었다.

충남도는 2001년 이와 같은 유관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고와 동아일보가 함께 유관순상 위원회(위원장 충남도지사)를 구성, 2002년부터 해마다 수상자를 내고 있다. 국가와 지역사회에 이바지한 여성에게는 ‘유관순 상’이 상금 2000만원과 함께 수여되고 여학생에게는 ‘유관순 횃불상’이 주어진다.

우리 충남이 배출한 유관순 열사의 위대한 애국애족정신이 영원히 기려 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변평섭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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