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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개척교회 담임목사, 자전적 이야기 글로 풀어내다

[인터뷰] 신간 쓴 김진혁 목사

2023.01.10(화) 13:14:03 | 천안신문 (이메일주소:icjn@hanmail.net
               	icjn@hanmail.net)

시골개척교회담임목사자전적이야기글로풀어내다 1


충남 아산 ‘뿌리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김진혁 목사는 지난 2014년 2월 막내 동생을 잃었다. 

 

이보다 먼저 김 목사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김 목사의 아버지는 해병대 특수수색대에서 복무했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리고 교회 관리집사로 42년을 헌신했다. 그리고 세 아들을 뒀는데, 김 목사는 둘째다. 

 

김 목사는 아버지의 자식 교육이 보수적이고, 때론 폭력적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보인 건 전쟁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조차 막내아들의 죽음 앞에선 속절없었다. 김 목사는 “그렇게 강인하셨던 아버지는 마치 떼를 쓰듯 오열하셨다”고 적었다. 

 

김 목사의 동생 고 김진규 목사는 2014년 2월 이집트 무장단체 ‘인사르 베이트 알마크디스’의 자살 폭탄테러로 이집트에서 숨졌다. 당시 고 김진규 목사는 중동 아랍선교 사역을 준비 중이었는데, 폭탄테러가 그의 선교사 소명을 앗아간 것이다. 

 

김 목사 역시 슬픔을 이기기 어려웠다. 그러다 슬픔을 달려보려 페이스북에 관리집사로 살아오신 아버지와 자신의 형제들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이 같은 자전적 고백은 지난 20일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세움북스)란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김 목사는 이 책을 쓴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숨진 고 김진규 목사는 중동 아랍지역 선교사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형님과 둘이서 동생의 시신을 이집트로부터 직접 수습해오고 장례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때부터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눈물이 아무 때나 나오기 시작했어요. 이런 슬픔을 달래보려고 페이스북에 하루에 한 편씩, 42년 관리집사로 살아오신 부모님과 그 밑에서 자란 우리 3형제의 이야기를 써 올렸습니다.” 

 

김 목사는 아버지의 폭력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아버지의 폭력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삼형제는 지금 모두 목사로 성장했다. 

 

“(아버지는) 전기줄로 때렸습니다. 때론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맞기도 했고, 아령을 던지면 받아내면서 굴러야 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는 성경을 보시면서 우리에게 한 구절 한 구절 읊어주십니다.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가출을 했고 고등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갔지요.” 

 

“전쟁후유증을 심하게 겪었던 아버지를 통해 교회를 경험했으니 저희 3형제는 교회가 영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언젠가 어른이 되어 독립하면 교회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저희 삼형제 모두 목사가 됐습니다. 제 책을 통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과거를 회상하며 글로 풀어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가장 방황이 심했던 저의 이야기가 중심이고요.”

김 목사는 아산에서 목회활동을 하지만 고향은 서울이다. 김 목사는 2016년 아산에서 ‘뿌리교회’를 개척해 목회활동을 이어오는 중이다. 아산으로 오게 된 계기에 대해 묻자 김 목사는 이렇게 답했다. 

 

“대학 진학까지는 서울에 있었고, 대전 한국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충청도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전임전도사로 천안에서 8년을 보냈습니다. 이후 개척을 고민하다가 천안에 오래 있다 보니 갑자기 고향이나 대전으로 가는 게 부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부사역자로 있던 곳에 교회를 개척하는 건 상도의(?)에 어긋난다고 보았습니다. 대부분 목회자들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천안을 떠나되 그 생각의 결도 끝까지 지키고, 마치 옆 동네에 본가가 있는 듯 든든한 마음으로 개척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이 어딜까 하다가 찾은 곳이 아산 배방이었습니다. 

 

지금은 상가건물에 입주해 있으나, 개척할 당시엔 배방 구령리 농가주택 사이의 넓은 마당이 있는 창고건물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고, 호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아산에 온 뒤 김 목사는 붕어빵을 손수 만들어 이웃들에게 나눠주며 교회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붕어빵을 택한 이유가 특별하다. 

 

“제 외모는 그리 달가운 외모가 아닙니다. 길을 가다 말을 물으면 깜짝 놀라는 분들도 계실정도죠. 거기에 교회 전도지를 들고 다니면 오히려 교회가 더 싫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산에 정착을 하게 되면서 동네교회 꿈꾸었으니 동네분들에게 뿌리교회를 알리는게 우선이었고 그 분들과 친해지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교회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주보도 잡지처럼 ‘뿌리’라는 이름의 잡지처럼 제작을 해서 배포를 하며 붕어빵을 무작정 직접 배달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하니 먼저 말을 걸어와 주시더군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 젊은 사람이 이 시간에 일은 안하고 맨날 뭐 하느냐 라고 말이죠. 그렇게 그 분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이후 매주 목요일은 공수리에 뿌리교회 붕어빵이 뜨는 날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붕어빵을 파는 분들을 고려해 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 목사에게 혹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물었다. 김 목사는 이렇게 답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제 인생에 아버지가 제일 싫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진학하면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이 제일 부러워하는게 모태신앙입니다. 제가 모태신앙이죠. 그런데 제 아버지도 아직 전쟁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전 한동안 맞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게다가 폭력적이고 세상에서 가장 대하기 싫었던 아버지의 직업이 교회에서 일하는 관리집사였습니다. 그게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집사란 사람이 왜 그러냐’ 소리치고 도망나온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버지가 되어보니까 ‘아버지도 함께 회복 되는 중이었고 함께 자라는 중이었구나’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딱 제 나이 때까지의 아버지만 이해하는 것이지 그 분의 인생 자체를 전부 이해하기란 너무 거대합니다. 

 

거기까지 만이라도 괜찮습니다. 제 과거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 자신 역시 본인들 역시 회복되고 자라야하는 중에 실수투성이라도 살신성인으로 아들인 저를 보살피고 아껴오신 부모님의 희생이었구나’ 하고 깨닫자, 아프고 상처투성이인 과거가 부끄럽지 않고 너무 소중한 추억이 되더군요.  


이 책은 그런 저 자신을 생각하게 하고 지금을 더 소중하게 살게 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이 점 독자 여러분께서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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