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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오도항 소금창고

당진포구를 통해 당진의 포구문화를 재조명하는 레지던트 작가들을 만나다

2022.08.27(토) 04:35:16 | 헵시바 (이메일주소:hannana153@naver.com
               	hannana15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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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참여연대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관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를 찾아다니며 역사 탐방을 하는데요. 오늘은 당진시청 문화관광과 남광현 팀장과 함께 송산면 금암리에 있는 오도항으로 역사 탐방을 왔습니다. 
당진은 서해안과 접해 있어 조선시대 이전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했는데요. 이에 세곡 운반을 위한 많은 포구와 염전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던 지역입니다.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포구들은 점차 쇠퇴해 이제는 옛 지명이나 문헌을 통해 당시의 명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농경지로 변했지만, 여전히 많은 지역주민에게 당진의 관문이자 대표 항구로 기억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오도항입니다. 오도항은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역천 변에 있던 포구로서 고대면 슬항리 오섬 나루와 인천을 오가던 나루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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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섬포구는 일제 강점기부터 당진의 외항 역할을 하던 곳이며, 일제 강점기 간척에 의해서 연륙되면서 인천항을 오가는 큰 포구로 발전하였습니다. 
역천 하류에 위치한 오섬은 원래 송산면 당산 3리에 있는 옛 포구였다고 합니다. 역천을 사이에 두고 고대면 슬항리의 오섬 나루를 건너다니던 곳이었는데요. 원래는 큰 오섬, 작은 오섬이라는 두 개의 섬이었다고 합니다.
오도항은 충청남도 최초의 간척공사로 약 5년에 걸쳐 지게로 돌과 흙을 날라서 막았다고 합니다. 포구의 개항 시기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로 추정되는데요. 1927년 이곳의 대지주인 일본인 하나다[花田]가 더 넓은 토지 확보를 위해서 개인 자금으로 거먹산에서 오도까지 500m 정도 바다를 막기 위한 간척 공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간척지에서 생산된 막대한 쌀을 수송하기 위해서 화물선이 정박하였다고 합니다. 간척 공사가 끝난 후에 서산, 당진 등지에서 사람들이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정착민들이 생필품, 공산품, 농기구, 기름 등을 사기 위해서 인천에 왕래하기 위해서 오도항이 개설되었고, 최초로 여객선이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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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항은 일제 강점기에 인천 기선회사가 선박을 독점해 운영했는데요. 이곳에서 인천으로 수출되는 곡물이 1년에 수십만 석에 달했으며 상당수의 승객이 매일 왕래하던 곳이었습니다. 인천행 증기선은 1960년대 말까지도 명맥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섬에는 어선들도 많았다고 하는데요. 1960년대 초반에는 김광배 씨가 운영하는 닻배(풍선)가 두 대 있었으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동력선이 등장해 어선이 10여 척으로 늘었다고 하네요. 이때의 어선들은 오섬 인근에서 조업하는 소규모 어선부터 연평도 흑산도 근해까지 올라가 조업하는 중급 규모의 어선들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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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들어서는 철선으로 바뀌었으며 조업 범위도 동지나 해상으로 확대됐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오섬항 일대에 점차 토사가 쌓여 어선들의 입항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더불어 장기간 조업을 위해 필요했던 얼음 공장이 당진에 없어 점차 어선의 출입이 줄어들었고 종국에는 석문방조제가 막히면서 바닷물의 흐름까지 막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7년 석문방조제 공사로 완전히 바다가 막히기 전까지 갯물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물이 드나들 적, 오섬포구에는 어선 말고도 고대면 슬항리를 오가는 교통수단이었던 나룻배로 사람들을 실어다 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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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항의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맞은편에는 당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약 110평의 직사각형 소금 창고가 보존되어 있는데요. 소금 창고는 일본인 하나다[花田]가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지붕 형태는 각목을 이어 붙여 만드는 일본식 갓쇼형태의 대들보에 함석이 덮여 있는데요. 벽은 회벽에 목재가 조화를 이룬 생선 모양 공법으로 지어진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독일인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소금 창고는 지진에 흔들리지 않는 내진공법으로 설계되었다고 하는데요. 다 허물어져 가던 창고를 박기호 관장이 인수해 허물어진 벽을 털어내고 회벽을 보완한 후 복고풍의 모양과 색상의 함석으로 마감처리 해 복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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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호 관장은 2019년 당진의 근대 문화유산 보존 사업의 일환으로 소금 창고를 매입했다고 합니다. 이후 활용방안 고민 끝에 2020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레지던트 작가들의 작업공간로 활용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21년에는 8명의 작가들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올해는 류소리, 정지연, 이예은, 박용화, 안경진 총 5명 작가가 참여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작가들은 포구에서 생활했던 실제 주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청취하며 당진의 포구를 주제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당진포구의 문화와 경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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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의 포구는 삼국시대부터 당나라를 오가는 나루가 있어 경제·문화 교류의 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박기호 관장은 당진의 포구를 통해 당진 지역문화를 재조명하고, 지역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하는데요. 
박기호 관장과 레지던시 작가들은 당진포구의 현황을 조사하며 기록해 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발품을 팔아가며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존하는 포구는 16곳, 사라진 포구는 31곳이라고 합니다. 지도에 표기한 당진포구의 특성과 자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조사 일정과 계획을 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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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했던 헛간도 버려진 나뭇가지로 장식하니 멋지게 변모했네요. 녹이 슬어 버려졌던 철근과 쇠 파이프, 연장 등도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당진포구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전통문화와 민간신앙, 민속문화, 농요, 풍어제 등 다양한 포구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데요. 많은 포구가 사라지며 잊혀가는 당진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복원하려는 멋진 사람들을 만나 가슴 뿌듯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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