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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윤봉길 생가, 빛이 나타나는 곳

대한의 청년, 윤봉길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1) 덕산 시량리에서 태어나다

2022.05.25(수) 23:48:50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윤봉길이 태어난 광현당

▲ 윤봉길이 태어난 광현당



“쾅!”

천둥 같은 굉음이 하늘과 땅을 울렸다. 순식간에 단상의 7인이 쓰러졌다. 도열해 있던 2만의 군사들은 하늘의 소리에 놀라 움츠렸다. 상해의 훙커우 공원에서 “4월 29일에 폭발소리로 맹세하리라”고 맹세한 대한의 청년 윤봉길의 정의의 폭탄이 터진 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 청년 윤봉길은 자신의 목숨을 불꽃처럼 태워 민족의 자유를 찾고자 한 것이다. 

이제부터 24년간의 삶을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하늘에 올라 ‘천신(天神)’이 된 윤의사의 삶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윤봉길은 덕산의 시량리 도중도(島中島)라는 마을에서 윤황과 경주김씨의 큰 아들로 1908년 6월 21일 태어났다. 어머니 김씨 부인은 용처럼 우람하게 생긴 구렁이가 입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한다. 봉길(奉吉)은 별명이다. 본명은 우의(禹儀)이며, 자는 용기(鏞起)이다. 어려서부터 장군감이란 말을 들었으며, 살쾡이란 별명이 말해주듯 총명하고 매우 용감했다. 파평윤씨의 판도공파로 고려시대 명장 윤관의 28대손이다. 그의 집안이 덕산의 시량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증조부인 윤재(尹梓) 때부터이다. 증조부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윤봉길의 조부는 그 중에 막내인 윤진영(尹振榮)이다. 그의 집안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된 것은 할아버지의 노력 덕분이었다. 조부는 마을 사람들한테 ‘땅두더지’라고 불려질 정도로 부지런한 농사군이었다. 당진의 송악에서 살다가 부친을 따라 시량리로 이사 온 그는 검소하고 근면하였으며 집안을 일으킨다는 일념으로 농사일에 온 힘을 바쳤다.

윤봉길이 세 살 되던 해인 1911년 도중도에서 다리 하나 건너 이웃으로 이사하였다. 시량리 178호에서 시량리 139호로 이사한 것이다. 그가 출생한 집은 1974년 보수하면서 ‘빛이 나타나는 집’이란 뜻으로 광현당(光顯堂)이라 하였다. 이사 한 집은 저한당이라 하였는데 이는 ‘한국을 건져 낸다’는 뜻이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윤봉길생가빛이나타나는곳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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