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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일본군의 본거지를 소탕한 부산포해전

충무공 이순신 이야기

2022.05.25(수) 23:25:01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부산포해전상황도

▲ 부산포해전상황도



일본군선 470여 척 정박 확인
총공격 감행 일본 진영 공격
장수와 군졸 공로 높이 평가


이순신이 이끈 전라도 수군은 제3차 출동을 마친 후 미리 전술 훈련을 하는 등 앞으로의 해전을 대비했다. 그런 가운데 1592년 8월 하순경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가 보내온 공문에 ‘일본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는 정보를 받았다. 이것은 사실상 한산도해전에서의 패배로 바다를 통한 보급지원이 무산된 일본군이 육지를 통한 서진을 위해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공격하고자 북상했던 일부병력을 소집한 것이었다. 어쨌든 전라좌우도 연합함대는 출항을 서둘러 8월 24일에 좌수영을 출발, 제4차 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전라좌우도의 전선은 모두 166척으로, 전선은 74척, 종선(從船)인 협선은 92척으로 구성되었다. 8월 25일 사량 앞바다에서 원균의 경상우수군 10여 척(추정)과 합세한 후 적정을 탐색하면서 동진한 조선수군은 28일 ‘김해강에 머물고 있던 적선이 며칠 새에 몰운대 바깥바다로 급히 나갔다’는 적정을 파악하였다. 이에 29일 가덕도에서 출항한 조선수군은 날이 밝을 무렵에 장림포 앞에서 적의 대선 4척과 소선 2척을 분멸한 후 다시 가덕도로 와서 밤을 보냈다. 

조선수군은 9월 1일 새벽에 출발, 동진을 하여 화준구미에서 대선 5척, 다대포에서 대선 8척, 서평포에서 대선 9척, 절영도(영도) 앞 바다에서 대선 2척을 각각 만나 모두 분멸하였다. 이후 부산포에 일본군선 470여 척이 정박 중인 것을 확인하고는 곧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조선수군은 초량목에서 선봉으로 나온 대선 4척을 모두 격파하고, 장사진(長蛇陣)으로 돌진하면서 일본 진영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선은 당시 부산성 동쪽 산언덕 밑 3개소에 정박해 있었는데, 조선수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배 안과 성 안, 산 위, 굴 속에 있던 적들이 거의 다 산으로 올라가 6개 처에서 철환과 화살을 쏘면서 대항하였다.

조선수군의 장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각종 총통을 발사하며 하루 종일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했다. 비록 용장 정운(鄭運)이 전사한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적의 본거지를 소탕했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가진다. 부산포해전의 승리에 대해 이순신은 “전후 열 번 접전하여 모두 다 승첩하였어도 장수와 군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부산전투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일본수군은 부산포해전 이후에는 해안에 축성(築城)한 뒤 육상에서만 조선 수군을 상대하려는 해전회피 전법이 고착화되었다. 
/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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