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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일본의 전쟁전략을 무산시킨 한산도대첩

충무공 이순신 이야기

2022.05.16(월) 17:11:50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한산도해전 상황도

▲ 한산도해전 상황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 유인
학 날개 모양으로 적군 공격
일본 전선 59척 격파 완승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두 번째 출동(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에서 72척의 적선을 격멸한 후 각 주둔지로 복귀하였다. 한 달여가 가까워질 때 일본군이 가덕·거제 등지에서 10~30여 척씩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에 전라도 수군은 모여 격멸계획을 논의하였다. 

한편 조선 수군에게 7차례에 걸쳐 참패를 당한 일본군의 전쟁지휘부에서는 육전에 참가하던 수군 지휘관들을 남하시켜 조선 수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먼저 남하하여 함대를 꾸린 후 서진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전라도 수군은 7월 6일 좌수영을 출발하여 경상도 노량에서 원균이 이끈 전선 7척과 합류한 후 창신도에서 야박하였다. 7월 7일 해상상태가 좋지 못한 가운데 당포(현 통영 미륵도 서쪽)에 이르러 밤을 지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산 정상에서 피란 중이던 목자(牧子) 김천손은 견내량에 정박하는 일본군선 70여 척을 발견한 후 마침 당포로 입항하는 조선 수군에게 달려와 적정을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김천손의 정보를 토대로 작전계획을 논의한 결과 적을 한산도 앞으로 유인하기로 하였다. “견내량은 수로가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전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적이 만약 패하게 되면 육지로 올라가 우리 백성들을 해치게 된다.”는 이유였다. 당시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상륙해도 틀림없이 굶어죽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당시 유인 임무는 방답진의 첨사였던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이 맡았다. 7월 8일 아침 출항한 조선 수군 58척은 마침 적의 정탐선 2척을 발견하고는 이를 쫓는 체하면서 항진하여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학익진(鶴翼陣)’을 벌여서 일시에 진격하도록 하였다. 학익진은 학 모양으로 진형을 형성하여 적선을 포위한 가운데 화포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거북선을 선봉으로 각 전선에서는 선재화포로 공격하여 적선을 쳐부수자 일본군들은 당하지 못하고 사기가 꺾여 도망하였다. 

한산도 해전은 단 기간 내에 승부가 결정되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전선은 1척의 손실도 없이 일본 전선 73척 중 59척을 격멸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일본의 정예 수군 함대를 물리쳤기 때문에 일본의 수륙병진전략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전황은 조선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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