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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기쁨보다 코로나의 고통속에서 맞는 ‘신문의 날’

2022.04.14(목) 09:24:46 | 놀뫼신문 (이메일주소:nm4800@daum.net
               	nm4800@daum.net)

 

지난 4월 7일(목)은 제66회 ‘신문의 날’이다. 1986년 4월 7일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가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일을 기념해 1957년 제정되었다. ‘신문의 날’은 신문의 사명과 책임을 자각하고 자유와 품위를 강조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다. 과거에는 전국의 모든 신문이 휴간하고 하루를 오붓하게 즐기던 호시절도 있었다.

신문협회는 매년 신문의 날 표어를 선정 발표하였는데, 1959년 첫 작품이 ‘언론의 자유’였고, 이듬해는 ‘악법의 철폐’, 그 다음해엔 ‘신문의 책임’이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2022년 ‘신문의 날’ 표어를 선정한다면 ‘각자도생(各自圖生)’쯤이 어울리는 듯하다.

종이 신문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를 운명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많은 뉴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보통신기술(ICT)이 주도하는 다매체 시대로 전환되면서 시대적 아젠다를 설정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일만큼은 “언론의 몫”임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왜?’가 빠져있는 보도자료 베껴쓰기 

 

‘기레기’라는 표현이 일상화될 만큼 언론에 대한 반감이 어느 때보다 높다. 이는 언론의 역할에 대한 갈구가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부나 기관에서 내놓은 보도자료가 수백, 수천 건씩 기사화되고 있다. 다량의 기사 내용이 거의 같다.

공장에서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듯 보도자료와 큰 차이가 없는 기사들이 언론사와 기명만 달리해 대량 생산된다. 그런데 그 기사에는 ‘왜?’가 빠져 있다. 기자가 취재로 채워야 할 공백이 바로 ‘왜?’라는 질문인데,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특히 요즘 같은 선거철, 정치인들이 SNS에 무언가를 올리면 그 내용이 사소하건, 중요하건, 사실이건, 거짓이건 상관없이 그 내용을 인용해 쏟아지는 기사들이 범람하는데, ‘왜?’가 없는 대표적 케이스다. 이러한 손쉬운 기사 전달 방식은, 사회 곳곳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공동체에 전달하는 기능보다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전달자의 기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2020년 5월 3일 시작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단계적으로 완화되고 있다. 지난 4일부터는 2주 동안 거리두기 기준을 완화해 식당과 카페 등이 “사적 모임 10인 이내, 자정까지” 영업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는 18일부터 거리두기를 전면 해제하는 방안까지 검토되면서 이제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거라는 시민들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인류가 2년 이상 앓아 온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지난해 11월 발견돼 불과 3개월 사이에 전 세계에서 지배종이 된 오미크론 변이가 기존 델타 변이에 비해 치명률이 낮아졌다지만 정말 ‘약한 종’인지, 또 그 이유가 뭔지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고통을 견디는 과정이 곧 "부활"

 

많은 과학자들은 오미크론 변이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최종 변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오미크론 계통 변이들이 계속 진화해서 새로운 계통의 후손들을 생성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계통의 새로운 변이가 나타날 수도 있다.

세계의 유수한 과학자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변이가 왜 이렇게 전파력이 강하고, 완벽하게 막아낼 방법은 뭐고, 다음에는 또 어떤 변이가 몰아닥칠까?” 이같은 의문점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2년 이상을 앓아 온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우리 인류가 알고 있는 바는, 아직도 별로 없다.

며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남”을 찬양하는 날 부활절이다. 그리스도교 최대 절기인 부활절이 왔지만 부활의 기쁨보다는 코로나19의 고통이 지속된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두 세사람만 자신의 이름으로 모여도, 자신이 그곳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와 인간이 구축해 온 문명과 문화의 핵심은 '모임'이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인류의 ‘모임의 문화’를 부정하고 있다. 고통 없는 부활은 존재할 수 없다지만,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견디는 과정이 곧 부활일 것이다.

본격적인 봄을 선포하는 부활절, 코로나 바이러스의 종말도 선언하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을 일궈낸 고통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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