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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백세불천(百世不遷)에 빛나는 논산 윤황 고택

선비정신으로 주변과 조화를 이룬 간결의 미학

2022.01.14(금) 09:41:27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윤황고택 사랑채

▲ 윤황고택 사랑채


충남 논산은 충청과 경기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기호(호서)유학의 중심으로 유교적 사회 이념을 실천한 파평 윤씨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파평 윤씨가 논산에 뿌리내린 것은 1540년경 승지공 윤돈이 파평에서 처가인 논산 노성으로 옮겨온 이래 아들 윤창세에 이어 손자대에서 노성 5방파가 파생되면서 가문을 번성시켜 연산의 광산 김씨, 회덕의 은진 송씨와 더불어 호서삼대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논산의 파평 윤씨 5방파 가운데는 문정공 윤황과 그의 직계가 가장 번성하며 슬하의 8형제 모두 걸출한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이 가운데 다섯째 윤선거는 송시열, 송준길과 더불어 충청 5으로 불리었고 손자인 명재 윤증은 소론의 영수로 재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직을 사양하면서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아 백의정승으로 불렸습니다.

백리헌 종택과 명재 고택에 이어 방문한 윤황 고택(충남 민속문화재 8)은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마을에서 가장 안쪽에 건축 되어 있습니다. 선비의 정신처럼 간결하게 지은 전통 가옥으로 중부 지방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윤황 고택 안내도.

▲ 윤황 고택 안내도.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 그의 6대손 윤정진이 영조때인 1730년 경 충남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현재의 장소로 옮겨 재건축한 것으로 대대로 종가로 사용되며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윤황의 제사를 모시는 재실.

▲ 윤황 고택 재실.


성리학의 이념을 받들어 청과의 전쟁인 정묘와 병자호란 당시 사관으로서 김상혼 등과 극력 척화를 주장했던 윤황은 사후 이 같은 충절을 기려 영의정으로 추정됐으며 정조로부터 불천위를 하사받았습니다
.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에 대해 4대를 넘겼어도 사당에 신위를 영구히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으로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인 말입니다. 충남과 대전에는 충무공 이순신, 고불 맹사성 등 모두 48위의 불천위가 있어 가문의 영광이자 권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유교가 국가이념인 조선에서 제사는 가장 중요한 가문의 행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장손의 주관하에 지내는 제사는 고조부까지 최대 4대를 봉사지만, 이는 3품 이상 고위 관직을 거친 경우만 그렇고 벼슬 없는 대개의 서민들은 부모에게만 제사하는 1대 봉사가 원칙입니다. 그 위의 조상은 신위를 땅에 묻고 시제를 통해 한꺼번에 모시게 되어 있지만, 언제부터인지 허례가 늘면서 4대로 부풀려졌다고 합니다.

윤황 고택의 특징 중 하나는 인근 명재고택과 같이 사랑채에 담장을 만들지 않은 점입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자연석 기단이나 초석과 완급을 조절한 툇마루의 높낮이에서 오는 리듬감, 목재의 부드러움은 주변과 조화를 이룬 빼어난 건축물입니다.

 

윤황고택 사랑채 전경.

▲ 윤황고택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다.


담장이 없는 사랑채는 전면
7, 측면 3칸의 형입니다. 가운데 2칸의 대청은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아 전체를 개방할 수 있습니다. 툇마루를 높여 난간을 설치하고 그 아래 온돌아궁이를 들였습니다.
 

오른쪽에서 바라본 윤황 고택 사랑채.

▲ 오른쪽에서 바라본 윤황 고택 사랑채.

왼쪽에서 바라본 윤황고택 사랑채.

▲ 왼쪽에서 바라본 윤황고택 사랑채.

윤황고택 사랑채 대청. 문을 걷어 올려 서까래에 매달 수 있도록 했다.

▲ 윤황고택 사랑채 대청. 문을 걷어 올려 서까래에 매달 수 있도록 했다.

윤황고택 사랑채 후면.

▲ 윤황고택 사랑채 후면.


사랑채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ㄱ자형 안채와 형 아래채가 이어져 ㄷ자형으로 건물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안채는 가운데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과 부엌이, 오른쪽에 건넌방이 있습니다. 안채와 마주 보는 5칸의 아래채는 대청 2칸과 온돌방 1. 부엌 2칸이 나란히 배치됐습니다

 

윤황고택 안채로 들어가는 일즉문.

▲ 담장이 없는 윤황 고택 이지만 안채는 외부와 구분하는 담장과 출입문이 있다.

 

윤황고택 안채. 후손들이 이전해 현재는 비어있다.

▲ 윤황고택 안채 전경. 현재는 후손들이 거주하지 않는다.

윤황고택 안채의 대청마루.

▲ 윤황 고택 안채의 대청마루.  

윤황고택 안채의 낮은 굴뚝. 겸손의 의미와 방충의 실용성을 갖고 있다.

▲ 윤황 고택 안채의 낮은 굴뚝. 겸손의 의미와 방충의 실용성을 갖고 있다.

윤황고택

▲ 윤황고택 아래채 전경.


안채 뒤 오른 편으로 높은 지형에는 재실이 있습니다
. 윤황 고택은 마을의 가장 뒤편에 있는데 사랑채 동쪽으로는 사각형 연못에 동그란 작은 섬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사계 김장생 고택과 윤증 고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건축학자 사이에서 논산지역의 어떤 공통적인 계획이념이 있는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세계관의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뒷담에서 바라본 윤황고택.

▲ 뒷담에서 바라본 윤황고택.

 

이렇듯 한 지역의 고택들은 생활을 위한 공간이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조상의 지혜와 기술, 문화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택에 걸려 있는 현판 하나에도 주인의 학문과 사상의 경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단순한 생활 영역을 넘어 문화 예술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윤황 고택의 장독대.

▲ 윤황 고택의 단촐한 장독대.


윤황고택을 찾았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인근 제실도 함께 찾으면 좋을 듯합니다
. 윤황 재실은 1665(현종 6) 안채를 짓고 1695(숙종 21) 문간채와 동재 서재를 건축해 지금도 남아 350여 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습니다.

파평윤씨 문정공파 종실

▲ 파평윤씨 문정공파 종중이 있는 윤황 종실

윤황 재실

▲ 윤황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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