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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마을해설사와 함께하는 대호지면 적서리 탐방

글의 동산 문원사에서 차천로 선생을 만나다

2021.09.30(목) 21:55:51 | 헵시바 (이메일주소:hannana153@naver.com
               	hannana15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을해설사와함께하는대호지면적서리탐방 1

당진마을만들기 지원센터에서는 마을해설사와 험께하는 대호지면 적서리 마을탐방 프로그램을 잔행했습니다. 박복순 마을해설사가 적서리의 유래에 대해 전해 주었습니다.적서리는 일대의 토색(土色)이 유난히 붉기 때문에 붉은 땅, 즉 '붉은 쥐'라 해서 ‘적서리(赤鼠里)’라 했다고 합니다.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노서 하전형(老鼠下田形) 지형이므로 ‘적서리’라고 하였으며, 이 밖에 도산이란 도사가 산세를 보고 ‘적서리’라고 정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서북쪽에 고양이 바위라 하는 바위가 있는데, 고양이가 늘 쥐를 바라보고 있어 쥐는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 늙은 쥐라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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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이동해 강선옥 해설사와 함께 마을벽화를 감상하고 벽화그림에 대한 해설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대호지면 적서리는 바다가 육지로 변하여 곡창을 이루고 가뭄으로 불안전했던 농업이 전천후 농업 기지로 변한 곳이라 농산물 소득이 높다고 합니다.특히, 칸탈로프 멜론과 호박고구마가 맛이 좋아 전국에 소문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농산물 구매를 위해 적서리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황량한 외벽에 벽화를 그렸는데 방문자들에게 호응도가 높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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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로 785길에 다다르면 공덕비와 효행비가 나란히 서 있는 길이 나오는데요.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적서리로 들어가면 차천로(1556~1615)의 영당인 문원사가 나옵니다.차천로는 ‘강촌별곡’에서 벼슬을 버리고 경치 좋은 시골의 자연에 묻혀 한가롭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노래했는데요.그가 광해군 때 모해를 입고 피난할 당시 썼다는 강촌별곡이 쓰여 진 곳이 문원사는 아니지만 적서리는 강촌별곡 같은 노래가 나올만큼 고즈넉하고 정감가는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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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사는 차천로의 후손(연안 차씨 오산공파)들이 당진에 세운 사당입니다.차천로의 고향은 개성이지만 그의 후손들이 적서리로 낙향하여 이곳에 사당을 세웠고 세월이 흐르며 연안차씨 집성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분이기에 사당 이름도 글의 동산이라는 문원사(文苑祠)로 지었다고 합니다.사당의 오른쪽에는 아름드리 팽나무 두 그루가 세월의 무게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문원사는 돌로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약 20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외삼문이 있습니다.1954년 정문인 이 외삼문을 보수하며 규화문(奎華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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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화문을 지나면 문원사 사당이 있습니다. 이곳은 정조 14년에는 차천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지만 고종 30년에 차천로의 13대손 차영열이 영정을 봉안하고 문원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오산 차천로 선생은 문장과 시화에 뛰어나 임진ㆍ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또한 가사문학의 대표작 ‘강촌별곡’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글씨로 유명한 한석봉과 함께 문장으로서 이름이 높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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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에 모신 영정은 선조 때의 인물화가 이신흠이 그린 것의 복사본으로 차천로는 당시 40세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원본은 해마다 제를 지낼때면 다른 곳에 모셔 놓고 있는 영정을 모셔온다고 합니다.차천로는 조선 중기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했는데요.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청원문을 썼는데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까지 이름을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헙니다.일본에 갔을 때도 많은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짧은 시간에 많은시를 쓰는 재주도 있었다고 합니다.차천로뿐만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차천로 3형제까지 문장이 뛰어나 ‘차문삼세오문장(車門三世五文章)’이라 불렸다 하니 대대로 문장이 특출했던 집안이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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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옥 해설사가 차천로 관련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임진왜란 때 차천로와 한석봉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부호가 유명한 화가의 복사꽃 화조(花鳥)그림을 받아 병풍을 꾸며 놓았답니다.그리고, 명나라의 문장가와 명필가를 초청해 화제시(畵題詩)를 지으려 했는데 이 때 차천로와 한석봉이 구경하러 갔다가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차천로는 시를 짓고, 한석봉은 이를 병풍에 썼다고 합니다."같은 모양 복사꽃인데 색깔이 다르구나이 뜻을 가져다가 봄바람에 물었더니그 복사꽃 사이에 다행히 말하는 새가 있어짙은 분홍이 엷은 분홍에 비쳤다고 하더라"이를 본 명나라 문장과 명필들이 명시(名詩)에 명필(名筆)이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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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해설사가 문원사 뒷편 드넓은 텃밭 맞은편에 보이는 아름들이 느티나무 2그루에 얽힌 전설을 전해주었습니다.또한 이 곳 적서리에는 차천로의 후손인 연안 차씨들이 약 20% 정도된다고 합니다.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가인 차천로의 사당을 모신 문원사는 적서리에 사는 연안 차씨 뿐만 아니라 대호지면과 당진의 자부심입니다.깊어가는 가을날 글의 동산 문원사에서 차천로의 강촌별곡을 마음속에 조용히 읊조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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