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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백제 마지막 고도 부소산성에서 보낸 한가한 여름

2021.08.05(목) 00:14:47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강경과 부여의 공통점은 바다로 나아가기에 쉽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강경은 바다와 가까웠지만 지리적으로 면적이 좁아 한 국가의 수도로서의 한계로 보면 제2의 수도였던 공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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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찾아가 본 부소산성의 여름 속에 한가한 일상처럼 보이는 풍광이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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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에는 고란사라는 사찰을 비롯하여 군창지, 사자루, 궁녀사, 태자골 숲길을 비롯하여 낙화암까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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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부여는 사방으로 평야가 펼쳐져 있고 구드레나루터를 통해 바다로 나가는 것이 비교적 용이했다. 정림사지를 중심으로 아래쪽에는 부여나성이 있고 위쪽에는 부소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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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청이 자리한 곳을 중심으로 본다면 부여는 아래로 궁남지가 있고 궁남지 옆에 화지산과 우측에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좌측으로 휘감아 도는 강은 백마강으로 금강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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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부여에는 지금의 시설보다 훨씬 많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곳이다. 낙화암에서 백제의 마지막에 많은 궁인과 궁녀들이 강에 빠져서 백제의 마지막을 불태웠다고 하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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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고대 지도는 지금의 지형을 토대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미 천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고 그 토대 위에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어떤 건물이 자리했을지 알기란 모든 사람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않는 이상 알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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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든 간에 땀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수건이라도 가져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물 정도는 들고 다녀야 이 시간을 버텨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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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암이 있는 곳에서 강을 건너가면 왕흥사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많은 백제의 유물이 나왔다. 부여 주변으로만 보아도 수많은 사찰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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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낙화암까지 올라와서 건너편의 왕흥사지가 자리했던 곳을 바라본다. 흐르는 땀은 눈을 가리고 연신 땀을 닦아내도 샘솟듯이 흘러나온다. 사리기가 출토되어 왕흥사의 창건 시기를 밝히고 백제사 문헌을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한 왕흥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백제의 절터다. 저곳에서 발굴된 사리기는 백제 위덕왕 24년 (577)에 제작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리기(舍利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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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를 가서 돌아보면 전체적으로 열린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주는 도성보다는 하나의 지방을 관리하는 곳으로는 적당하지만 도성으로서는 좁아 보인다. 그렇지만 부여의 지도를 보면 정림사지와 부소산성을 비롯하여 보령시와 서천, 익산을 이어 줄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는 공간이 부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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