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감정의 결이 촘촘하게 만들어주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가서 이곳을 왔다는 인증샷을 찍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보는 것은 그 공간과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부여에도 성지가 있는지 몰랐는데 우연하게 지나가는 길에 지석리 성지라는 곳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충남의 천주교는 한국 천주교의 태동과 전파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곳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새롭게 생각의 결이 하나 더 생길 수 있듯이 국도변에서 새로운 것을 보면 직접 가서 보는 편입니다.
올해 여름은 너무 더워서 조금만 걸어도 땀이 금방 흐르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한국 천주교의 4대 박해를 모두 겪으면서 순교자가 없었던 곳이 부여라고 생각했습니다. 충청남도에는 적지 않은 성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제는 부여도 빼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곳은 쉼터처럼 보이는데 태양이 너무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서 쉬기에는 좀 불편해 보였습니다. 그늘막이 잘 설치된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종교가 천주교라서 그런지 성지는 무언가 친숙해보입니다.
충남에만 천안 성거산 성지, 아산 공세리 성당, 남방재 성지, 당진 솔뫼·신리·원머리 성지, 합덕성당, 서산 해미 순교성지, 보령 갈매못 순교성지, 공주 수리치골 성지, 황새바위 순교성지, 예산 배나드리·여사울 성지, 홍성 홍주성지, 서천 산막골 성지, 금산 진산 성지, 부여 지석리 성지, 청양 다락골 성지 등이 있습니다.
지석리 성지에서 옆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팔충사가 나옵니다. 부여의 낙화암이 있는 곳에 가면 삼충신인 계백, 흥수, 성충을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을 가본 기억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거기에 복신, 동침, 혜오화상, 곡나진수, 억례복유를 합쳐 백제의 팔충신과 서기 660년 7월 황산벌에서 나라를 구하려고 항전한 백제 오천결사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팔풍제 제순은 계백장군이 출생하여 학문과 무예를 연마했다는 천등산 정상에서 고천제를 올리고 칠선녀가 쑥으로 만든 홰에 채화하여 팔충사로 봉송, 성화단에 점화한 후 지역 주민이 참여하여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계백과 오천결사대가 훈련, 출전을 결의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었습니다. 매번 황산벌만 보다가 색다른 이야기도 접하게 되네요.
천주교 성지와 백제의 혼을 담았다는 팔충사가 거의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조금은 독특해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역사 산책은 부여 농촌의 역사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