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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순국열사 이학순 선생 추모비와 효은재

독립운동가 이학순과 이내순 부자 이야기

2021.05.16(일) 12:43:28 | 대로 (이메일주소:dried@naver.com
               	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기 이전에는 이학순 선생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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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에서 신원사로 가는 길에 '순국열사 이학순 선생 추모비'를 알리는 이정표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순국열사 하면 유관순 열사만 머리에 떠올랐는데, 사실은 일제에 항거하여 목숨을 바치신 분이 한두 분이 아니라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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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좁은 길 양옆 논에 물이 가득합니다. 모내기가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우뚝우뚝 솟은 소나무 군락 사이로 집이 몇 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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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 사이로 저녁 햇살이 곱게 내려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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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같은 건물이 보이고 앞에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그중에서 왼쪽에 있는 비석의 글씨부터 읽어봅니다. '순국선열 전주이공 학순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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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순 선생에 대한 행적이 비석의 삼면 가득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이학순 선생에 대한 약력이 국가보훈처에서 설치한 안내판에도 기록되어 있어서 읽어보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학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이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학순을 회유하고자 그에게 은사금을 보내고, 받도록 온갖 협박을 다 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대는 그를 투옥하고 고문까지 가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고초 때문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자유로운 몸이 된 이학순은 1910년 12월 7일 나라를 잃은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고, 그의 아들 이내수는 군자금 모집 등의 공훈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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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는 '효은재 중건 기적비'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마도 뒤에 보이는 재각이 효은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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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순 선생은 전주이씨 익안대군 17대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익안대군 6대손 인의공파 효은재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이학순 선생의 선조를 모신 사당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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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문양이 그려진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 중 가운데 문은 신이 출입하는 문이라 해서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고 제사를 지낼 때만 엽니다. 사람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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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은재의 삼문 중 오른쪽 문이 열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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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바라본 삼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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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은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재각의 모습입니다. 모두 6개의 문이 기둥 사이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벽 위에 창문도 두 개씩 달려있어서 열어 두면 시원한 바람이 드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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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돌아가 보았더니 기다란 굴뚝이 지붕을 받치듯 솟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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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순 선생에 대한 기록은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아드님인 이내수 선생에 대해서는 백과사전 등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비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이학순 부자의 행적을 살펴봅니다.

이학순 선생은 1843년 전라북도 완주에서 출생하여 공주 대장리(현 하대리)에 기거하시다 논산군 연산면의 대명산 아래 한양촌에서 살았습니다. 청렴강직한 선비로서 유림 내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합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에 고종황제께 상소를 올려 일제의 야욕을 밝히고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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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유림에 영향력이 컸던 선생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을 주겠다고 여러 차례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자 협박하고 투옥을 하였습니다.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틈을 이용해 자결함으로써 그 의지를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학순 선생이 나라 사랑 정신은 그분의 두 아드님에게 전수 되었습니다. 특히 장자인 이내수 선생은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1인으로 서명까지 한 분입니다. 이내수 선생은 대규모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시다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이내준 선생도 형을 도와 독립운동에 앞장서셨다고 하니 삼부자가 애국 투사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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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 이학순 선생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정말 기개가 높고 나라 사랑의 마음이 위대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 50여 년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아들 이내수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모역에 봉안하였습니다.

또한, 2016년 그분이 한때 거주하셨던 이곳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에 추모비를 세우고 기리고 있습니다.
순국열사 이학순 부자와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수많은 애국 영령들을 향해 감사의 묵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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