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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4월 29일, 윤봉길 의거 89주년을 기리다

내포칼럼-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2021.04.26(월) 16:05:02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4월29일윤봉길의거89주년을기리다 1



‘장부출가생불환’ 각오로
상해 홍커우공원서 의거
한중 우호 협력은 윤봉길 영향 커
 
일제의 국제적 위신 꺾고
반제국 투쟁 정의 구현해
 
세계 각국서 찬사뜻 보낸
독립운동사 최대 성과 의의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89주년을 맞는 날이다. 윤봉길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유언을 남기고, 부인 배 씨에게 ‘물좀 한 그릇 주오’라는 말로 영원한 이별을 하고 상해를 향해 집을 나섰다.

자신의 길에 조금도 의심이 없었으며, 자신의 행위가 정의를밝히는 길이며, 하늘이 내린 지상명령이라고여겼다. 상해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 ‘마음의 폭탄’을 가슴속에 지니고 왔다면서, 이봉창 의사와 같은 임무를 맡겨줄 것을 청했다. 한인애국단에가입하고 왜적의 처단을 맹서(盟誓)했으며,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상해 점령의 승리를 외치던 침략의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져 응징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윤봉길의 상해 의거만큼 큰 성과를 찾기란 쉽지 않다. 윤봉길 의거는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의거 소식은 중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의 영국·프랑스·러시아·스위스 등 많은 나라에 곧바로 타전돼 언론에 보도됐다. 심지어 남미의 아르헨티나에까지 전달됐다. 윤봉길을 ‘열사’로 호칭하면서 공경하는 뜻을 표시했으며, 논찬과 시평 등을 통해 의거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찬양했다. 윤봉길은 체포된 뒤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의거를 일으킨 것은 “세계 사람들에게 조선의 존재를 명료하게 알리기 위해서다”라고 했으니,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윤봉길 의거는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에게 철퇴를 가하는 큰 전과를 수립했다. 윤봉길이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식을 박살냄으로써일제는 승리가 무색하게 되고 국제적위신까지 꺾이게 됐다. 당시 군사력이 없던 상황에서 최선의반제국 투쟁이면서 정의 구현을 위한투쟁이었다.

윤봉길 의거는 1920년대 이후 약화하던 독립운동을고양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회생시켰다. 임시정부국무령을 지낸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물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의상태로 비유하면서 이를 구해 낸 것이 윤 의사라고 평했다. 윤봉길의 피로 임시정부가 되살아난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로 국내의민중들은 허무주의와 퇴폐, 심지어는 허무맹랑한 자치론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윤봉길 의거는 한국인들에게민족의식을 일깨워 항일전선에 나아가게 했으며, 미국·하와이·멕시코·쿠바 등에 사는 한인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후원이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윤봉길 의거는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중국인의반한감정을 해소했다. 또한장제스와 김구와의 회담이성사돼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됐으며,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설치해 한인 장교를 양성하게 했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한중연합전선이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윤봉길의거 소식을 라디오로 청취한 중국의요녕민중자위군 사령관 탕추우(唐聚五)는 조선혁명군 참모장 김학규와 합작 협정에 서명하고한중연합전투를 수행해 승리를거뒀다. 윤봉길 의거는 중국인의 항일정신고양에도 기여했다.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에서일본에 패한 중국에서는 윤봉길을 ‘중국의 민족영웅’이며 상해사변의 ’순국열사’라 칭송하면서 중국에도 윤봉길과 같은인물이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윤봉길을 상해사변에서 희생된 열사로 기리고 있으니, 한중 양국이 우호와 협력의 길을 쌓아 온것 역시윤봉길 의거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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