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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추사와 화암사

숭유억불 속에서 불교를 만난 조선의 선비

2021.03.15(월) 16:32:34 | 안개비 (이메일주소:hae041@naver.com
               	hae04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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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가는 길(내포문화숲길 이정표)
 
지난 두 차례 방문에 추사고택과 기념관, 화순옹주 홍문, 그리고 백송을 보았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 사진의 '화암사'라는 곳이 무척이나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시간을 내어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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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
 
500년 조선시대는 건국과 함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한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하면서, 타 학문은 배제하고 오직 유학만을 정도로 내세우던 사회였습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모순을 낳게 되었고, 이에 약해진 국력으로 일제에 강제병합되는 아픈 역사까지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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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넘어 공존하는 열매와 산수유꽃
 
이처럼 조선시대에 불교는 서민층에게 가까이 있었고, 유교는 귀족 계층의 전유물일 정도로 서로 상극인 사회였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불교와 교류한 유학자들이 있었으니 그중 한 인물이 바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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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향실
 
추사가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정립한 초의 선사에게 써 준 현판으로 '화로 하나 있는 다실'이라는 뜻입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소개로 40년이 넘는 우정을 나눈 추사와 초의 선사는 차(茶)라는 공감대가 있었겠지만, 그 궁극에는 유교와 불교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고, 그 사상과 진리에 대한 교류가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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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을 알리는 별꽃
 
조선후기 실학을 추구하던 시기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그 꿈을 피우기 위한 노력이 있지 않았을까요? 이렇듯 추사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사상의 근본이 되었을 법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화암사(華巖寺)'라는 배경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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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 묘소
 
추사 유적지에서 화암사까지는 낮은 산으로 이어지는데, 용산(74m) 아래로는 추사고택과 묘소가 있으며, 오석산(95.8m) 중턱에는 오늘의 목적지인 화암사가 자리하고 있답니다.
 
추사기념관을 출발해 김정희 선생 묘소 뒤편으로 화암사를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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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가는 길
 
화암사 가는 길은 소나무가 숲을 이룬 편안한 오솔길이 계속되며, 며칠 후엔 진달래도 제법 보일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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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산
 
10분 정도를 걸으니 오석산 정상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화암사를 만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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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산길로 오다 보니, 앞문이 아닌 뒷문으로 들어가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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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채
 
화암사는 앞쪽이 요사채가 자리하고, 대웅전은 뒤편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개인 원찰로 사용되었던 시기에 사대부로서 손님을 맞이하고 공부도 하였을 공간이 절 앞쪽에 위치한 이유겠지요.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화순옹주와 혼인하며 추사고택 일대 토지를 별사전으로 받았는데, 화암사는 이 토지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중건하여 집안의 원찰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 어린 시절부터 화암사를 왕래하였을 추사도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불법이 기본 품성에 섞여들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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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대웅전과 약사전이 요사채 뒤편으로 보입니다.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 말사이며, 현재는 비구니 스님의 도량으로 남아 있답니다. 이 즈음에 화암사 주변으로 복수초가 예쁘게 피어나는데, 아직 피질 않는다고 걱정하시는 스님 말씀에 소박함이 가득하네요.
 
이제,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남긴 암각화의 흔적들을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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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석불 뒤편 바위에 빨간 점 원안으로 '천축고선생댁'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도의 옛 선생이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를 말하는 듯합니다. 이는 재치있는 문구라고 하지만, 결국 유교사회에서 불교를 신앙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변명의 표현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노년에 과천 봉은사에 기거하면서 불교를 학문만이 아닌, 신앙으로 삼았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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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
 
대웅전 뒤편 바위에는 '시경(詩境)'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만난 스승 옹방강이 선물한 남송 시인 육방옹의 '시경'의 탁본을 스승 옹방강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새겼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대웅전 뒤편은 추사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이상향을 찾고자 했던 고민의 장소였으리란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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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
 
시경이 새겨진 바위 옆으로 가니, 안내문이 소봉래를 찾아가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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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봉래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를 안전하게 살필 수 있는 데크를 설치해 두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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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봉래(小蓬萊)

'소봉래' 그리고 그 아래 '추사제(秋史題)'라 암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승 옹방강의 집앞 석순에 새겨진 '봉래'란 글을 '소봉래'라 옮겼다고도 하는데, 금강산의 여름 이름이 봉래산이며,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는 추사에게는 이 화암사가 있는 곳을 작은 금강산이란 의미로 소봉래라 새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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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추사가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걸었을 그 길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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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까치꽃
 
추사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이 모두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아니면 오직 자신만의 이상향을 꿈꾸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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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228년의 느티나무 보호수 
 
요사채 앞에 추사가 심었을지도 모를 한쪽 가지만을 남긴 저 노거수는 추사의 생각을 보았고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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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
 
높은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향해 달렸지만, 뜻대로 되는 않는 세상에 대해 원망도 무력감도 느꼈으리라 짐작되네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학문과 예술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추사 김정희!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는 그의 정신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정진의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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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선생해천일립도(허련)
 
40년 지기 초의선사가 소치 허련을 제자로 삼도록 하였으며, 허련은 추사의 제주도 유배 중 3차례에 걸쳐 왕래하면서 스승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때 스승의 귀양살이를 본 제자는 아린 가슴으로 그 모습을 남기게 되었고, 그림 속 추사는 세상을 초월한 맑고 편안한 표정이니 이 추사의 모습이 화암사에서부터 그가 얻고자 했던 평정의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화암사
-소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1길 21-29

추사기념관
-소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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