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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집 자체가 박물관인 서천 이하복고택

검소한 삶을 실천한 계몽운동가 이하복 선생

2020.11.18(수) 07:48:23 | 유리향 (이메일주소:dried12@naver.com
               	dried12@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서천 가볼만한곳’을 검색하면 노출이 잘 되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살아생전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서천 이하복고택을 추천합니다.
 
사실 이하복고택은 겉모양만 보면 그저 평범한 농가일 뿐이고, 아무 때나 출입이 가능한 곳도 아닙니다. 또한, 이하복 선생이 그렇게 유명한 분이 아니라서 그런지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토록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추천하는지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집자체가박물관인서천이하복고택 1
 
이하복고택은 어린 시절 우리가 살았던 전형적인 시골 초가입니다.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지만 제 눈에는 그냥 너른 벌판이 바라보이는 한적한 시골 마을 정도로 보일 뿐입니다. 집앞에 오래된 향나무 몇 그루와 동백나무와 장독대 등이 자리하고 있고, 열 개 정도의 돌계단을 오르면 두 채의 초가집 사이에 굳게 닫힌 대문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초가가 국가 중요 민속자료 제197호로 지정된 것을 보면, 이렇게 잘 보존된 집이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집자체가박물관인서천이하복고택 2
 
대문 위에는 가목재(稼牧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가(稼)'는 이색 선생의 부친인 이곡 선생의 호 '가정(稼亭)'에서, '목(牧)'은 이색 선생의 호인 '목은(牧隱)'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대대로 살았던 이하복 선생 일가가 이색 선생의 후손인 한산이씨라서 가목재라고 이름한 것 같습니다.
 
집자체가박물관인서천이하복고택 3
 
안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나 기웃거리는데, 운 좋게도 가목재를 관리하시는 분을 만나서 옆의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하복고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형태였습니다.
 
집자체가박물관인서천이하복고택 4
 
안채 마루에는 방명록과 책 한 권이 놓여 있었습니다. “왔다 사랑했다 그리고 갔다”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은 집앞 돌에 이하복 선생의 셋째 따님이 썼다는 글귀와 같았습니다. 이하복 선생의 유언을 적은 것이라고 해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모든 세상 만물을 사랑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라는 평범하면서도 함축적인 이 한 마디가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하복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와세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교편을 잡다가 1944년 일제의 학병 입대를 거부하고 이곳 서천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과 교육사업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집자체가박물관인서천이하복고택 5
 
이하복 선생은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무척 검소하여 평생 책상 하나를 썼으며, 쓰던 물건이 망가지면 꿰매 사용했다고 합니다. 어느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모두 보관해 놓아서 집이 박물관 그 자체였습니다. 이하복 선생의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기와집을 짓자고 하자,
“기와 얹는데 쓸 돈이면 주변 땅을 사서 농사지어 나눠 먹는 게 낫지 무슨 소리냐?”라며 버럭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이런 조상 대대로 검소한 태도가 이하복 선생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 같습니다.
 
집자체가박물관인서천이하복고택 6
 
관리인이 창고문을 열자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 나왔습니다. 온갖 도자기와 그릇들이 한가득 창고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랍 속에서는 그분과 가족들이 사용하시던 각종 물건이 가득하였습니다. 평소 입던 옷가지와 버선에까지 문화재청이 스티커를 붙여 놓을 정도로 모두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집자체가박물관인서천이하복고택 7
 
관리인이 열어 보여주시는 지갑 속에는 신분증까지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걸 보면서 아파트 쓰레기장에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을 생각해 봅니다. 이하복 선생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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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복고택에는 방안에도 마당 구석에도 물건이 그득합니다. 서천 특산물인 한산모시를 짜내는 베틀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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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도 고운 가마와 가재도구들, 이하복 선생이 즐겨보던 경제 서적들이 창고에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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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지 아시나요? 맞습니다. '똥장군'입니다. 어린 시절 이것을 지고 가 논밭에 뿌려주던 어른들의 모습이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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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복 선생은 해방 후 서울에 학교를 세우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사재를 모두 털어서 서천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서울은 내가 아니라도 학교를 세울 사람이 많다. 서천은 내가 아니면 누가 학교를 세우겠느냐?”라며 지방 교육을 위해 동강학원을 설립했다고 해요. 그러한 공으로 후에 훈장을 받았으며, 이 집안에서 세 명의 박사가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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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 바로 옆에 있는 이하복고택 전시관으로 갑니다.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이하복 선생이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이하복 선생의 할아버지는 음악을 참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하복 선생도 사랑방에서 음악을 듣고 가야금을 연주할 정도였다고 하니 대대로 이어져 온 음악 가족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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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풍금 좀 보세요. 지금도 발판으로 공기를 넣고 건반을 누르면 쿵작쿵작 멜로디가 울려 퍼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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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와 레코드판도 그대로네요. 이하복 선생은 여성교육에도 힘썼다고 해요. 그래서 부인과 따님 등이 글씨를 잘 쓰고 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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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복전시관에는 고택에서 나온 유물들을 골라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근대 200년의 역사가 이곳에 모두 모여 있는 것이지요.
 
집자체가박물관인서천이하복고택 16
 
충청남도 서천은 가볼 만한 곳이 정말 많습니다. 이규선 서천군 해설사님의 말씀으로 이글을 마무리를 갈음합니다.

“서천은 생태산업단지 80만 평이 조성되어 있어서 국립생태원과 해양생물자원관 등이 있고 목은 이색선생의 문헌서원,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 생가지, 한산모시 전시관 등 현대와 과거가 어울린 살아 있는 교육의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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