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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비성(泗泌城)의 뚜렷한 단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마주한 시간

2020.10.03(토) 21:04:38 | 황토 (이메일주소:enikesa@hanmail.net
               	enikesa@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추석을 나흘 앞둔 9월 마지막 주말인 27일(일), 하늘빛은 정녕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맑은 가을하늘의 전형이 바로 이런 빛깔이라고 알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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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푸른 가을날, 정림사지 매표소 앞
 
부여의 정림사지 매표소 앞에서 가족 단위로 보이는 사람들이 입장료를 계산하고 있었다. 어른은 1500원, 청소년은 900원, 어린이는 700원이다. 매표소 옆에는 부여관광안내도와 유네스코세계유산에 소개된 부소산성, 나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 등의 안내글이 있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설명글도 친절하게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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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입구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부여정림사지 안내글'에서
 
정림사지 안내글 표지
▲정림사지 안내글 표지
 
‘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으로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는데,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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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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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좌상 
 
오층석탑 뒤편엔 금당지와 강당이 있다. 지금 금당지는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정림사의 옛터,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사비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1963년 보물 제108호로 지정된 불상으로 고려시대 만들어진 이 석조불상은 어깨가 좁고 가슴으로 왼손이 올라가 있다. 불에 타고 형체만 겨우 남은 석조불상, 그리고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상처는 사비성(泗泌城)의 뚜렷한 단서가 아닐까. 탑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당시의 불타고 있는 역사의 한 장면을 상상하니 마음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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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오층석탑

  탑을 돌며 백제의 부흥(復興)을
  두 손 모아 빌던 시간들,
  하늘에 이를 때 소슬한 바람소리
  그 밤에 소쩍새 울었을까.

  모든 것이 불타고 사직(社稷)마저 스러질 때
  149매 돌조각의 우뚝한 탑(塔), 태어난
  이름마저 잃었던 시간을 견뎌온 역사의
  상처는 사비성(四城)의 뚜렷한 단서.

  천오백여 년이 지난 오늘의 삶에도
  백제가 닿을 수 있는 건
  중흥(中興)의 염원으로 쌓아 올린
  거룩의 기단(基壇)에 서린
  편린(片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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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근처 솔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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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박물관은 오늘 휴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사비백제의 역사와 문화 관련하여 더 많은 이야기는 정림사지박물관에서 살펴보고자 했으나 9월27일(일) 현재 휴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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