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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금산의 중심 역할을 했었던 금강변의 용강서원

2020.06.08(월) 10:06:49 | 서영love (이메일주소:hush7704@naver.com
               	hush7704@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만든 재앙은 도망할 곳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말에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허문 뒤에 남이 망가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지만 쉽게 잊혀지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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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해 보이는 이치지만 바로바로 보이지 않으니 대충 살게 되고 쌓여서 돌아오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모든 것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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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변에 자리한 금산 용강서원은 충남의 문화재를 관리하는 곳에서 나와 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잔디를 깎고 서원의 건물을 정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금산의중심역할을했었던금강변의용강서원 3
 
용강서원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42년(1716)에 세워졌으며, 우암 송시열(宋時烈), 동춘 송준길(宋浚吉), 시남 유계(兪棨), 미호 김원행(金元行), 역천 송명흠(宋明欽)의 이야기가 내려오는 곳입니다. 회덕에서 활동한 은진 송씨의 흔적이 이곳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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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며 길을 찾는 것이 옛사람들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사실 진리가 특별하고 먼 곳에 있다고 여기는 것도 문제지만, 길을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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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서원은 건물이 한 동만 있는데 5칸 규모의 강당이 있는데,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은 좁은 공간으로 꾸며두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서원의 확장을 막는다는 구실로 폐쇄되었지만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매사 칼끝에 섰을 때 그 정체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겉모습과 실제 사이의 소실점, 한계선, 분수령을 잘 살펴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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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서원의 대청마루는 개방감이 있는데 대청의 문을 모두 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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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서원이 있는 이곳은 마달피라고도 불리는 곳인데 기병들이 말달리며 무술을 연마하고, 심신을 닦았다고 하여 붙여진 곳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 부근에서는 의병들이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곳이라고 합니다. 
 
시남 유계는 병자호란 후 한동안 금산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뒷날 용강서원에 배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호 김원행도 이곳에 배향되었는데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이었던 김원행의 할아버지 김창집이 사사되면서 그의 집이 바로 이곳 용화리에 있었기에 용강서원에 출입하면서 강론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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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서원의 앞을 흐르는 금강에도 용화리의 짙은 녹음이 그대로 반영되면서 마치 나무가 물에도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용강서원에서는 고문서 자료가 보존되고 있는데 강학을 위한 용강서당 문서나 오랜 시간 이곳을 방문했던 방문객 명단인 심원록은 용강서원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https://brunch.co.kr/@hitchwill/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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