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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해미순교성지(여숫골) 순례길에 오른 푸른 5월

2020.05.20(수) 05:34:18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요람인 충청남도 곳곳에는 천주교 전래와 선교의 역사가 많이 남아 있다. 당진의 솔뫼성지·신리성지· 합덕성당, 홍성의 홍주성지, 보령의 갈매못성지, 예산의 여사울성지, 청양의 다락골성지, 천안의 성거산성지, 아산의 공세리성당과 남방재성지, 금산의 지방리(진상)성지, 부여의 지석리성지, 공주의 수리치골성지와 황새바위성지 등 19곳이나 된다.
 
특히 서산시의 해미순교성지는 1797년(정사박해)부터 1872년까지 약100년 간 박해와 시련 속에 1,000여 명이 넘는 순교자가 발생한 슬픈 역사를 보듬어 안고 있는 곳이다. 지난 5월 중순,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로 처형당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해미순교성지 순례길에 오르게 되었다. 
 
해미순교성지: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해미순교성지: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생명의 책
▲생명의 책
 
생명의 나무
▲생명의 나무
 
해미순교성지(이하 해미성지)에 도착하니 대성당과 소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의 왼쪽에는 작품명 '생명의 책'이, 그 오른쪽에는 작품명 '생명의 나무'가 방문자들의 이목을 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순교성지에서 이루어진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말씀한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남기기 위한 조형물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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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안으로 들어가니 성모자상과 2014년 충청남도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동상이 방문자들을 맞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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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성지의 두 번째 순례 코스인 해미순교성지기념관(유해 참배실)은 순교자 유해를 모신 곳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따르면 1935년 서산성당의 주임으로 있던 프랑스인 범바로(P.Barraux) 신부에 의해 유해 발굴이 시작되어 해미성지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방한으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위한 시성식 집전을 계기로 성역화사업이 본격화되었고, 1985년 해미성당을 건립하였으며, 2003년에는 기념성전을 건립해 순교자의 뼈와 치아, 머리카락 등 유해를 모실 수 있었다고 한다.
 
함께한 일행이 있고, 정해진 일정이 있어 내부를 살피지 못하고 와서 개인적으로 해미성지에 재방문을 하게 되면 꼭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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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참배실 인근에는 농부에 의해 순교자 유해가 발견된 터를 알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해미현은 무관영장이 지역통치를 겸한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며 중앙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박해를 일삼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1천여 명이 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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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공경할 복자로 공식 선언된 인언민(마르티노), 이보현(프란치스코), 김진후(비오) 3인의 시복기념비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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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순교성지기념관에서 바라보니 '여숫골'이라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알려진 것처럼 해미성지는 '여숫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생매장터로 끌려가며 '예수, 마리아'라고 울부짖던 것을 죽음의 행렬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여수 머리'로 잘못 알아들은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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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개를 돌리니 영산홍으로 에워싸인 큰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순교 자리개돌'이라고 한다. 해미읍성 서문밖 수구 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라고 한다.
 
서문밖 순교지에 보존하다 해미도시계획 도로개설로 인하여 2009년 1월 8일에 생매장 순교성지 '여숫골'로 옮겨 보존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모조품으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박해 때 사약·몰매·교수·참수·동사 등 잔혹한 처형 방법이 행해졌는데, '자리개질'은 천주교 신자들의 상체와 하체를 포박한 후 건장한 포졸들이 돌에 내동댕이쳐서 처형하는 방법이라고 전한다. 머리가 깨지고 등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생을 마감했을 순교자들을 떠올리니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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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자리개돌' 근처에는 사형도구 하나가 더 있었다. 모르고 봤더라면 정원석으로 오인했을 이 돌은 구멍을 내고 줄을 매달아 천주교 신자들을 질식사시키는 도구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 사형도구는 해미성지뿐만 아니라 공주 황새바위성지처럼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곳에서는 발견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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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으니 '진둠벙'이 나타났다. 고요하게만 보이는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을 포박하여 산 채로 수장시킨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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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장면을 돌에 새겨 세운 14개의 '십자가의 길' 중 1~5기를 따라 걷다 다다른 곳에는 수많은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모신 묘역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천주교 박해 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선열들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해미 생매장터에서 발굴된 이 유해들은 1935년 4월 2일, 서산 상흥리 공수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셔졌던 것들로 성지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교회 차원에서 다시 원 위치인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해미순교탑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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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생매장 순교자의 묘' 옆으로는 '삼위 복자상'이 보였다. 앞에서 잠시 거론했듯이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한 해미 순교자들의 동상이다. 몇몇 자료를 살피다 보니 해미읍성 회화나무 앞에 있던 것을 해미성지로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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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해미순교성지기념관→순교 자리개돌→진둠벙→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와 해미순교탑→복자상' 순으로 순례길을 돌아 나오니 '노천성당'에 다다랐다. 해미성지 순례나 방문을 오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편안히 기도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라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라도 해미성지 순례길을 돌다 보면 1천여 명의 순교자들이 신앙 안에서 안식하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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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성지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궁금했던 초가 건물은 '이름 없는 집'이라 불리며, 순례자들이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성경 이어쓰기'를 하는 곳이었다.
 
궁금증을 동반한 학문적 접근으로 해미성지를 방문하게 됐지만,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던 무명 순교자들의 종교적 신념에 감복하며 해미성지 순례의 의미를 새롭게 찾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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