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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꽃길 따라 떠나는 면천나들이

면천나들이로 봄기운 가득 충전했어요

2020.04.17(금) 13:39:07 | 헵시바 (이메일주소:hannana153@naver.com
               	hannana15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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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진 개학으로 봄은 왔건만 마음은 한겨울인데요. 한가한 시간대를 골라 면천에 골정지로 향했습니다. 골정지 앞에 도착하니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백목련과 자목련, 팝콘처럼 움튼 연둣빛 새순을 터트리는 은행나무가 어우러져 눈이 맑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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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 골정지엔 온통 봄꽃의 향연인데요, 흰구름 뭉게뭉게 피어난 맑고 푸른 하늘을 담고 있는 골정지엔 가녀린 연분홍 꽃잎들이 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부유하고 있네요. 벚꽃과 연둣빛 새순이 물빛에 반영된 골정지의 풍경이 마치 나른한 봄날의 수채화 같습니다. 산들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을 맞으며 골정지 둘레길을 한 바퀴 걸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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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연암 박지원의 애민정신이 깃든 면천면 골정지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면천군수로 재임한 연암 박지원이 버려진 연못을 주변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면천군수 재임 시 골정지 조성 외에도 정조의 명에 따라 신농법의 과학농서인 '과농소초'와 토지개혁서인 '한민명전의'도 저술하는 등 애민정신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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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정지 맞은편으론 면천향교가 보입니다.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입니다.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고 선현제사를 하는 곳인만큼 향교는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도시 중심부에 가까운 위치에 있습니다. 면천향교는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면천향교는 태조 1년에 또는 태종 13에 세워졌다고도 하는 등 건립 시기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여느 향교들과는 달리 처음 세워진 장소에서 위치를 옮기지 않은 몇 안 되는 향교로 조선 초기의 향교 입지 형태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숙종 42년에 대성전 서쪽벽 등을 수리한 기록이 있으며, 1983년 대성전 보수, 1985년 명륜당 보수, 1986년 동재와 서재의 보수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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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분홍 진달래와 수선화처럼 물빛을 향해 꽃가지를 뻗고 꽃잎을 떨구는 벚나무의 모습이 명징스러울 만큼 맑고 눈이 시려 아름답습니다. 둘레길 중간에 쉬어갈 수 있는 의자와 정자도 있고 운동기구도 있어 골정지라는 장소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절로 건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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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중앙에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고 쓰여진 정자 아래에 앉아 사진을 찍어보았습니다. '건곤일초정'은 1800년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있을 때 세워졌다는 정자입니다. 당시 버려진 연못 한가운데에 돌을 쌓아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정자를 지었는데, 인근 면천향교의 유생들이 이 정자를 찾아 시를 읊고 학문을 익혔다고 합니다.

이 정자는 일제강점기에 소멸되었으나 2006년 당진시에서 1억 6천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복원하였습니다. 연꽃으로 가득한 골정지(骨井池)라 불리는 약 9900m²의 연못에 예전처럼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약 33m² 크기의 초정(草亭)을 지은 후 돌다리를 놓았습니다.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란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정’이라는 의미로, 두보의 시구절에서 차용한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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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정지의 벚꽃 향기를 한껏 품고 대숲바람길로 향했습니다.산들바람에 사르르 촤아~ 사사삭대는 대숲길 사이로 내리쬐는 봄볕이 맑고 청신해 코로나 19로 답답하기만 하던 일상에서 시나브로 힐링되는 치유의 숲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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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바람길을 지나니 영랑효공원이 나오네요. 공원 옆에는 면천읍성 복원사업으로 면천초등학교가 이전한 자리에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된 면천은행나무도 보입니다.

봄까치꽃과 노오란 민들레 사이에는 진분홍 진달래가 만발한 공원에는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나비의 날개짓이 어우러져 따뜻한 봄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은데요, 면천은행나무와 영랑효공원에는 복지겸 장군의 딸, 영랑에 대한 설화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면천에 살고 있던 고려의 개국공신인 복지겸 장군이 병으로 누워 있자 그의 딸 영랑이 백방으로 약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했고 영랑은 아미산에 올라 성심껏 백일기도를 드렸다고합니다. 백일기도 마지막 날에 신선이 나타나 진달래를 사용해 두견주를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그곳에 은행나무를 심은 뒤 정성을 드리면 나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영랑은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했더니 아버지 복지겸 장군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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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원 앞에는 군자정이 있습니다. 이곳 군자지는 고려 공민왕때 지군사 곽충용이 지은 못으로 그 가운데에 연꽃을 심었습니다. 익재공 이제현이 이것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으며 진흙에서 나왔어도 오염되지 아니하여 군자와 같다고 하였고, 송나라 주염계의 애연설의 말을 취해 군자지라 하였으며 일명 연당 또는 낭관호라고도 하였습니다. 또한 충청도읍지 면천조편 군자정기에 의하면 군자정은 1803년 당시의 면천군수 유한재가 피폐해진 군자지를 보수하면서 못 가운데에 둥글게 섬을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8각의 작은 정자를 만들고 못에는 연꽃 100 개를 심고 고기 천 마리를 넣었으며 둘레에는 복숭아와 버드나무를 심고 온갖 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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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이 네모진 것은 땅을 상징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요 정자가 팔각인 것은 8괘를 상징한 것이고 이곳에 심은 꽃과 나무는 만물을 상징한 것이라 합니다. 군자정은 그 뒤 허물어져 1959년 면천복씨 후손 복진구가 원래의 주춧돌을 그대로 둔채 규모를 축소하여 육각의 정자를 지었는데 그것도 퇴락하여 1994년 당진군에서 이 정자를 헐고 본래의 팔각정으로 다시 복원하였으며 2011년 군자지 준설과 주변을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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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을 둘러보고 면천보통공립학교 3·10 만세운동기념비앞에 섰습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책가방 대신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섰던 청춘들의 외침이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들려오는 듯 합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16세였던 면천보통학교 4학년 원용은 학생이 3·1운동을 목격하고 당진으로 내려와 동급생 박창신과 4학년 급장이었던 이종원과 함께 면천면 동문 밖 저수지부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천보통학교 교문까지 행진했던 독립만세 운동입니다. 이종원 학생이 남긴 회고록 덕분에 알려진 이 독립만세운동은 광주학생항일운동보다 10년이나 앞선 학생 주도의 독립운동이자 당진지역 최대 독립만세 운동인 대호지·정미 4·4독립만세 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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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 봄나들이를 마치고 미술관을 좋아하는 막내를 위해 '면천읍성안그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코로나19로 휴관 중이라 미술관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외관만 촬영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전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빼앗긴 것만 같던 봄이 시나브로 깊숙히 자리잡은 것처럼 오늘의 소박한 면천읍성 봄꽃 나들이를 하며 봄기운 가득한 에너지를 빵빵하게 충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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