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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

충청수영 기습을 지원한 이창구의 동학농민군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⑭보령의 동학농민혁명

2019.11.06(수) 00:33:39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충청수영성

▲ 충청수영성


오늘날 보령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보령현과 남포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령지방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1880년대 말경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령에 동학의 전래가 늦었던 원인은 보령의 지리적 위치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있다. 보령지방이 홍주에서 멀었고, 공주와는 태산준령으로 가로막혀 있었던 탓이다. 다른 원인으로는 보령지방은 일찍부터 양반사족이 입향하여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던 탓에 유림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이었던 것도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령지방에 동학이 전래된 이후 보령을 대표하는 접주로는 보령의 이원백과 남포의 추용성, 김기창, 김우경 등을 있다. 이들 남포의 추용성은 서천 접주로도 기록될 정도여서 남포와 서천을 아우르는 대접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4 9 18 최시형에 의해 기포령이 내려지자 보령지방 곳곳에서도 기포하였다. 하지만 보령지방의 동학농민군은 내포의 다른 지방에 비해 세력이 미약하여 독자적인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대신 내포지방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0 7 내포의 맹장 이창구가 오천의 충청수영을 기습하여 수사를 구타하고 무기를 탈취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 이창구의 동학군농민군은 내포지방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새벽에 수륙에서 양동작전을 펼쳤다. 작전으로 정예의 조선수군이 지키는 군사기지인 오천 충청수영을 점령하였다. 이창구가 군사기지인 충청수영을 점령할 있었던 것은 충청수영의 수군들이 내부에서 호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때 이창구의 동학농민군에 호응했던 군사들은 모두 보령지방의 동학도인들이었다.

충청수영에서 탈취한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내포 동학농민군은 이후 내포지방 곳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있었다. 이렇듯 기포 이후 보령지방의 동학농민혁명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0 21 남포 도화담에서 추성재, 이우성, 이성구 등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는 일이 발생했다. 일로 인해 보령지방의 동학농민혁명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보령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뜸해지자 보부상과 유회군이 등장하여 동학농민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빚어졌고, 유회군의 기세에 밀린 남포의 동학농민군은 접주 추용성을 중심으로 홍산, 서천, 비인의 동학농민군과 연계하여 활동하지 않을 없었다. 이후 홍주성 전투의 패배로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꺾이자 보령지방 동학농민군은 유회군에 밀려 대거 체포되었다.

11 8일에는 남포의 대접주 추용성, 김윤선, 서성보, 구승천이 관군에 잡혀 홍주로 압송되고 말았다. 

/()당진시동학승전목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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