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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청룡산 천년고찰 고산사를 품다

내포문화인물길을 따라 만해 한용운을 만나다

2019.10.04(금) 22:51:04 | 헵시바 (이메일주소:hannana153@naver.com
               	hannana15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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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문화인물길을 따라 선진들의 발자취를 찾아 중학교 동창 친구들과 청룡산 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 고산사를 찾았습니다. 고산사로 향하는 마을 입구를 조금 들어가다 보니 무량리 마을의 문화유적 고산사를 설명해 놓은 비석이 세워져 있네요.

고산사는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로 1672년에 여섯 번째 중수하고 1974년에 해체 복원되었으며, 요사채는 1984년에 이전 복원했고, 30평 규모의 요사채는 1987년 화주를 받아 신축했다고 합니다. 비석 뒷면에는 청룡산의 봉수대와 해문역터에 대한 설명 그리고 무량마을이 삼한시대부터 도요지가 있었다는 내용도 담고 있네요.

마을길 사이를 지나 산으로 오르니 마당처럼 큰 공간이 나오는데요,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며 오르막길을 오르고 싶으면 차를 여기에 주차해 놓고 올라도 될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고산사로 소풍을 왔을 적엔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한참을 올라왔었는데요, 대형버스가 올라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가파른 언덕길이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학창시절 소풍가던 추억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고산사에 도착하니 마을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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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고산사 앞에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으려고 앉았습니다. 사진 뒷편으로 공적비가 보입니다.  고산사 문화재의 전승 보존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던 지방의 뜻있는 인사들이 힘을 모아 토지 등 사유재산을 출연하여 고산사 진입도로를 확장하고 새전을 헌성하여 명실상부한 명찰의 면모로 일신하였다고 합니다. 그 공적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하여 공적비를 세워놓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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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단청과 고산사 중수현판이 멋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요사채 전면 6개의 기둥에 한글로 아름다운 글귀가 써 있네요.

  하늘에 햇빛 달이 
  땅 위에 모든 생명 
  허공 속에 산소가 
  주인이 따로 없듯 
  숨 쉬며 살아가는 
  우주가 나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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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사 대광보전은 고려 이전의 건축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적으로 국가지정 보물 제399호로 홍성군 결성 지방의 유일한 사찰입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팔작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이며, 다포계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산사 대광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불좌상은 소조불 특유의 섬세함과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며 고려 후기 양식을 계승, 조선 전기에 조성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토속적인 느낌을 주는 좌상입니다. 이 불상의 독특한 특징은 반듯하면서도 당당한 외모와 부드럽고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세부표현, 사실적인 신체비례, 좌우대칭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옷주름 표현 등에서 조선 전기 불상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미타불좌상을 직접 볼 수 없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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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타원형의 둥근 얼굴에 민머리를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둥글게 솟은 육제가 있으며 얼굴은 마모되어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편편하고 길쭉한 신체에 양 어깨를 모두 덮은 옷을 입었고 둥근 옷주름이 가슴 부분부터 발목까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른손을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 위로 들어 올려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는 시무회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기본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길쭉한 신체 비례 및 밋밋한 체구 등은 고려초기의 특징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본래 아랫마을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부처의 몸에서 나는 빛을 표현한 광배와 불상을 올려놓은 대좌는 없어지고 고산사로 옮겨져 모셔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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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사 뒷편 청룡산으로 오르면서 고산사 정경을 찍어보았습니다.
청룡산은 결성면 읍내리와 교항리에 길게 걸쳐있는 해발 236m의 산으로 등산하기 좋은 산입니다. 청룡산의 유래는 산줄기가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와룡천(臥龍川)의 용담(龍潭)에서 청룡이 풍경을 구경하는 듯 머물러 있다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또한 옛날옛적 효성 지극한 농부의 어머니를 산에 사는 용이 약을 주어서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산으로 그리하여 산 이름도 청룡산이라는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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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산은 결성면과 서부면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산입니다. 결성면 소재지의 북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천수만을 끼고 있고 산 서쪽에는 판교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결성)에 "고산(高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서북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결성)에는 "한 갈래는 남쪽으로 내려와 고을의 주산이 된다."고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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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홍성이지만 청룡산 등반은 처음인지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왔나 봅니다. 더군다나 오랫만의 산행인지라 헬기장을 향한 등산로를 수행하듯이 살금살금 산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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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양팔을 벌려 심호흡도 해보고 풍경도 감상하며 걷는 산길이 꽃이 피면 꽃길이요, 잎이 물들면 단풍길이고, 눈 내리면 설국으로 향하는 길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산과 숲, 숲과 마을을 잇는 길. 흩어져 세상살이 하던 친구들이 잠깐이나마 거친 산길을 걸으며 무념무상 속에서 산과 더불어 호흡하고 발을 디디며 목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낼 때마다 시나브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됩니다. 거친 산과 내 몸이 타협하며 내 자신을 만나고 타인과의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가다 보니 어느새 헬기장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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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산 줄기를 따라 조성된 내포 역사인물길도 있다고 하니 다음엔 결성향교를 출발해 고산사 삼거리에서 곧장 산줄기를 타고 봉수대터도 둘러보고 칼날봉으로 향하는 길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뒷편으로 민족의 큰 별 만해한용운선사 생가가 있다고 합니다.
청룡산 줄기 동쪽으로 빤히 건너다 보이는 만해 한용운 생가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나라 민족사에서 독립과 문학과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만해 한용운 선사의 고향마을로 향하는 의미 깊은 길입니다. 망대봉에서 가파른 내리막길과 산마루길이 계속 이어지다가 걸어 내려오면 아스팔트길과 만나는 가로공원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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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산의 정기가 쭉 이어지는 내포 역사인물길은 박철마을에 있는 한용운 선사의 생가기념관에서 끝을 맺습니다. 벗들과 함께 한용운 생가기념관 입구 안내표지석을 따라 산행으로 지친 몸을 북돋으며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쭉 걷다 보니 만해문학체험관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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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선사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온갖 시련을 겪던 시절에 독립운동과 종교인과 문학인의 삶을 살며 민족의 횃불과 소금역할을 하던 애국지사였습니다. 일제의 갖은 압박과 회유에도 대쪽같은 절개로 지조를 굽히지 않은 애국지사이며 한국 불교의 유신을 주창한 대선사이며, 한국 문단의 큰 별로서 가시밭길을 헤쳐가는 삶을 살다간 인물입니다.
 
한용운 선사는 승려로서 침체된 한국 불교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한국선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1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죽는날까지 서릿발 같은 저항의 지조를 꺾지 않은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문인으로서 나라 잃은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며 독립의 꿈을 잃지 않도록 희망의 불꽃을 활활 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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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8월29일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난 한용운 선사는 16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오세암에 머물다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순회하다 27세가 되던 해에 백담사에서 김연곡 선사에 의해 득도하고 깨우침을 얻습니다.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되자, 독립운동에 몸바치겠다는 생각으로 중국 망명길에 나섰다 일제의 정탐꾼으로 오인한 총탄에 맞는 바람에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 입은 상처로 평생 동안 아픈 몸과 함께 체머리를 흔들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다시 귀국한 후에는 백담사에서 참선하며 대중불교의 실천자로 활약하였습니다.

33인의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공약삼장을 지어서 독립선언서에 첨가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체포된 뒤에도 변호사와 사식과 보석을 신청하지 않고 지조있게 버텼고 합니다. 조선천지가 감옥인데, 감옥이 천국이라 생각하며 3년형을 마치고 출옥하였습니다. 출옥하여서도 거처할 집이 없고 굶기를 밥먹듯하여 영양실조가 되자 그의 어려운 형편을 보다 못한 친분 있는 인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성북동에 심우장이라는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조선총독부가 있는 곳을 바라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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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한용운 선사는 47세 되던 1926년에 백담사에서 우리나라 문학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시집을 탄생시키게 된다. 이 시집이 유명한 88편의 시가 수록된 ‘님의침묵’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안타깝게도 1944년 6월 29일에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홍성에서는 해마다 만해 한용운 선사를 기리는 뜻 깊은 행사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 청소년 문학상, 만해문학의 밤, 만해 문화제 등 다양한 행사들이 해마다 펼쳐지고 있습니다. 올해에도 홍성의 대표적인 문화제 ‘내포축제’에서 만해 한용운 선사를 주제로 하는 인물축제가 펼쳐졌습니다. 이 행사를 통하여 승려와 문학과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던 파란만장했던 삶을 재조명하며, 그 발자취들을 되새겨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만히 '님의 침묵'을 읊조려 봅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
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 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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