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 예산읍 신례원에서 수철리 저수지를 지나 올라가다 보면 계단식 다랑이 논이 보이고 외진 산골에 도착한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늑한 곳에 파란 함석 지붕집이 바로 수철리 공소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곳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집 한 채와 동네에 사는 몇 가구 외에는 풀숲으로 덮여 있었는데 오랜만에 방문했더니 누군가가 주위를 아름답게 꾸며서 공소를 만들어 놓았다.
오래 전에 수철리 공소는 신례원 창말까지 배가 들어오는 포구를 통해 무한천, 삽교천의 수로 교통과 연결되었다. 이곳 수철리 공소 고개를 넘으면 간양리 천주교 공소로 통하는 길로 이어진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수철리 저수지보다 지대가 높은 간양리에 터전으로 삼았다. 이 동네에 살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는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천주교 박해 때 포졸들이 이곳을 들이닥치면 신자들은 산길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간양리 쪽으로 피신하곤 했다고 한다.
충청남도 내포에 있었던 천주교가 1866년에 있었던 병인박해로 해체되는 위기가 있었다. 이에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들어가 담배 농사를 하거나 옹기를 만들어 장날에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곳 수철리 공소 주위에도 모여 살며 박해의 칼날을 피해가며 목숨을 건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공동체를 이루고 농토가 좁은 산골에서 산을 일구어 밭농사와 벼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다. 이 골짜기에 아직도 다랑이 논이 남아 있는 이유다. 더러는 나무를 베어다 불을 질러 숯을 만들어 지게에 지고 읍내 장날에 가서 팔아 생필품을 사고 살았다. 천주교 교우촌 마을 이름 중에 담배촌, 옹기골이 있는 이유다.
수철리 공소 주위에는 예수 그리스도 조각상과 성모 마리아 상이 서 있고 작은 공원을 아름답게 조성해 놓았다. 청정 오지 지역 같은 느낌이 드는 이곳에 오래 전에 소신 있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을 천주교인들의 후손들 몇 가구가 아직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