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인생을 가르치는 나무
마을의 수호신 같은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2019.05.08(수) 19:23:05 | 황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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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ikesa@hanmail.net)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판
▲오래 전 기찻길에서 쓰였음직한 침목 옆으로 목단꽃이 붉게 피었다
골목을 들어서니 조용한 시골마을의 한적함이 평화롭다. 5월의 햇살이 아직 따스하다. 논에는 모판이 나란히 반듯하게 모였다. 곧 모 심을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 녹간마을의 은행나무를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만난다. 지난 가을에 왔을 때는 은행이 주렁주렁 달리고 온 마을이 노란 단풍에 물들 것만 같았다.
▲주암리 녹간마을 은행나무
▲부축받고 있는 듯 지지대가 받쳐주는 은행나무
▲ 제사를 지내는 '행단'
은행나무 앞에는 ‘행단(杏壇)’이란 글이 반듯한 돌에 새겨 있다. 매년 음력 정초가 되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수명이 늘어 백세 인생 혹은 백세시대를 산다는 요즘이라지만 주암리 은행나무 앞에서 말하기에는 가소롭기까지 하다. 주암리 은행나무는 백제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당시 좌평 맹씨(孟氏)라는 사람이 심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니 나무의 나이는 1,500년에 이른다.
▲텅 빈 가슴, 그러나 충만한 사랑
‘백제, 고구려, 신라 3국이 망할 때마다 칡넝쿨이 감아 올라가는 재난을 겪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주암리 은행나무. 마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지켜보며, 조상들의 보살핌과 관심 속에 살아온 이 나무는 문화적,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1982년 11월에 천연기념물 320호로 지정되었다. 마을의 전염병이 돌았을 때 은행나무가 있던 이 마을만큼은 화를 면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영험한 나무라고 믿었단다.
1,500년에 이르도록 자기 생을 충실히 살고 있는 은행나무.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난다. 나뭇가지를 받치고 있는 기둥은, 일상 생활이 불편한 어르신을 부축하는 손 같다. 두 팔을 벌려 나무를 안으려면 장정 넷 이상은 있어야 할 만큼 품이 크다. 그 품 한가운데엔 뻥 뚫린 구멍이 나 있다. 마치 가슴이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잔가지들의 이파리는 하늘로 뻗으며 초록으로 싱싱하다.
▲평화로운 녹간마을, 마늘밭의 허수아비
▲ 사진 오른쪽, 45년생 후손목이 자라고 있다
▲은행나무 그림이 있는 담장
▲박태기나무 꽃과 전봇대 사이로 은행나무 가지가 검게 보인다
▲주암리 은행나무의 너른 품
은행나무 바로 옆에는 ‘후손목’으로 마을 주민의 삽목에 의하여 성장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세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천연기념물의 고사에 대비해서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계승하고자 식재한 45년생 은행나무는 2016년 10월 ‘유전성이 동일하다’는 국립산림과학원장의 확인을 받았다고 한다.
나라의 우환이 있을 때마다 마을을 지켰다는 신령스러운 고목. 은행나무가 오래도록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문득 어제 뵙고 온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