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탄서원' 전경▲ 공주(공산) 이씨 모선단 추향제를 봉행하는'명탄서원'의 강당 전경11월 12일(월) 오전 11시부터 '토착 성씨 공주(공산) 이 씨 모선단 추향제'가 봉행된다고 하여 공주시 월송동 명탄서원길 43에 위치한 '명탄서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 명탄서원 판액 '명탄서원'은 조선 성종 때 충남 연기군 '명탄'에 세웠던 '충절사'라는 사당으로 '명탄서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선조 18년(1585년)에 서원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을 철종 2년(1851년)에 공주의 유생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 명탄서원'의 강당 내부'명탄서원'은 공주(공산) 이 씨 문성공 '이명성'과 공숙공 '이명덕(1374~1444)' 형제의 학행을 기념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사액서원이며, 1998년 '명탄서원'의 강당이 완공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는 '충절사'와 '명탄서원(재실 겸 강당)' 그리고 마을회관이 배치되어 있다.
▲ 충절사▲ '이명성'과 '이명덕' 형제의 위패와 존영을 모신 '충절사' 내부1956년 '명탄서원' 사우와 '충절사'를 다시 건립하여 문성공 '이명성'과 공숙공 '이명덕' 형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다. 문성공 '이명성'은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며, 포은 '정몽주'와 교우한 고려 시대의 문신이다. 고려 말에 벼슬을 하여 적성 감구, 감찰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 왕조가 세워질 무렵 문성공은 "나라가 망함에 있어 이를 구하지 못하면 '충'이 아니요, 어버이가 늙었는데 이를 부양하지 아니하면 '효'가 아니다. 그러나 고국(고려)의 의리는 중하고 노모의 은혜는 가볍다."라 말하며 포은 선생과 만월대 아래에서 서로 눈물로 이별을 고한 후 동생 명덕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강원도 이천 산속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종은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 회유했지만, "차라리 옛날 초나라 굴원과 같이 귀를 자르고 물에 빠져 죽을망정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하고 끝내 이를 거절하신 분으로 그 후 '두문동 72 현'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공숙공 '이명덕'은 문성공 '이명성'의 동생으로 태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 때 이조판서를 거쳐 중추원 부사로 정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나이 70에 치사했으나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원사가 되었고, 궤장을 하사받을 만큼 학식과 덕망 있는 인물이다.
▲ '모선단'으로 오르는 길'충절사' 뒤편으로 토착 성씨 공주(공산) 이 씨 추향제가 열리는 '모선단'에 집안 후손들이 제향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 보인다. '명탄서원'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향을 모시는데, 11월 12일에는 공주 이 씨 (중)시조인 문성공과 서른아홉 분을 제향하는 행사라고 한다.
충절사 위 언덕에 위치하는 모선단에는 공주(공산) 이 씨의 시조인 공산군 '이천일'의 단소와 모선단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공주(공산) 이 씨의 『乙丑譜』에 의하면 시조 '이천일'은 문장이 뛰어나 신라 박혁거세 5년(B.C 53) 중국 한나라에 들어가 대사마, 대장군에 올랐고, 흉노 정벌에 공을 세워 요동백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공산군에 봉해졌고, 문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공산은 공주의 옛 지명이며 이를 통해 후손들은 공주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온 것이다.
▲ 공주(공산) 이씨 모선단 추향제를 모시는 후손들의 모습토착 성씨인 공주(=공산) 이 씨의 시조인 공산군 '이천일'과 서른아홉 분 조상님을 모시는 시제는 모선단(慕선단)에서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 1시간가량 진행되었다.
공주(공산) 이 씨 모선단 추향제를 마치고, 모선단 뒤편을 둘러보다 장구한 세월을 가늠하게 하는 푸른 이끼가 잔뜩 낀 깨진 기왓장에 눈길이 멈춰졌다. 2018년은 고려 건국 1100주년인 해이다. 고려의 충신인 문성공 '이명성'을 모시는 공주(공산) 이 씨 모선단 추향제를 통해 긴 세월에 많은 것이 변한다 해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옛 조상님을 모시는 일이며, 그 의식에는 그분들의 살아생전 행적과 깊은 뜻을 되새기는 후손들의 다짐이 더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