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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극장의 추억

한 번만이라도 가셨더라면

2018.03.24(토) 12:29:59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집안환경이 불우했던 까닭에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 했다. 그리곤 소년가장이 되었다. 홀아버지께서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하시어 집에 돌아가기조차 싫었다. 역전에서 힘든 일을 하며 돈을 벌었는데 아버지께선 툭하면 그곳까지 나오셨다.

그리곤 술 사 마실 돈을 달라고 하셨다. 그럼 어린 마음에도 주변사람들 보기가 ‘쪽팔려서’ 죽을 뻔 했다. 돈을 쥐어드리고 나서도 부끄러운 마음에 ‘생업’을 접기 일쑤였다. 그럼 광주리에 담았던 호두과자와 음료 등의 물건을 근처 가게에 맡기고 극장으로 갔다.

그 즈음 고향 천안엔 천안극장과 아카데미, 남산극장 등이 있었다. 지금과 달라서 당시엔 오전에 극장에 들어가서 같은 영화를 몇 번이나 본 뒤 깜깜한 밤에 나와도 누가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의 극장은 시설 따위가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열악했다. 때문에 여름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봐야 했고 추운 겨울에는 객석 중간 중간의 연탄난로 옆에서 곁불을 쬐며 봐야 했다. 뿐이던가......

담배연기로 자욱한 스크린은 언제나 비가 내렸으며 영화의 자막은 자주 잘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극장의 바닥에는 쥐들이 단합대회를 하는 양 몰려다니기도 했다. 재래식 화장실 역시 용변을 보다가 빠지는 날이면 익사할 게 뻔할 정도로 그렇게 깊이가 여간 깊지 않았다.
그렇게 영화를 보노라면 이따금 교복 차림의 학생들도 슬며시 들어오곤 했다. 그 즈음의 압권(?)은 남진 리사이틀(쇼)이 있던 날의 해프닝이었다. 돈이 없었지만 꼭 그의 쇼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천안극장의 문을 지키는 소위 기도아저씨가 한 눈을 파는 사이, 벼락 같이 극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곧 붙들렸는데 그 바람에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맞아야 했다.

구독하고 있는 신문에서 [3D.4D영화세대는 모를거야, 원도심 추억의 ‘시네마 천국’]기사를 봤다. 35년째 이 극장을 지키고 있다는 팔순 노(老) 주인의 “이제는 나이 먹고 갈 데 없는 노인들이나 오는 영화관이 되었다”는 토로에서 뭉클함이 느껴졌다.
아울러 “놀러오던 친구들도 다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이제는 홀로 남아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기자의 인터뷰 기사 전언에선 새삼 세월의 무상함까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생존하셨을 때 한 번만이라도 이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극장에 가셨더라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지금은 경황이 없지만 아들이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오면 시간이 날 터다. 그럼 아들과 며느리에 이어 딸과 사위까지 대동하여 극장에 가고 싶다. 

만세운동 재연행사가 열린 모 극장의 앞
▲ 만세운동 재연행사가 열린 모 극장의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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