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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원, “무령왕릉의 금, 어디서 왔나?”

공주학포럼에서 무령왕릉 금 이야기 펼쳐

2015.12.18(금) 10:58:08 | 금강뉴스 (이메일주소:s-yh50@hanmail.net
               	s-yh50@hanmail.net)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 유물은 2743점이다. 그러면 이 금은 어디서 생산되었을까?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세인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진 가운데 12월 16일 오후 2시부터 제8회 공주학포럼에서는 최석원 전 공주대 총장을 초빙, ‘무령왕릉의 금, 어디서 왔나?’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특강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최석원 존 총장이 무령왕릉 출토 금제유물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 최석원 존 총장이 무령왕릉 출토 금제유물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공주학연구원 고마나루실에서 개최된 특강에서 최석원 전 총장은 고대의 ‘금’에 대해 △고구려 유리왕 11년(BC 9) ‘상으로 황금 30근을 내리라’ △공주 수촌리(금동관, 금동신발 390∼440) △신라 일성 이사금 11년9144) 백성의 금·은·주옥 사용금지 △백제 285년 ‘일본에 야금술(冶金術)을 전하다’ △신라 성덕왕 29년(730) 당나라 현종에게 금 2천냥 진공 △통일신라 이후 사금생산 격감-채광·제련기술 부재로 쇠퇴 △조선시대 금광 개발정책 -사금광(함경·강원도, 연간 200냥) △근·현대-주로 일제 강점기 수탈 목적으로 개발 등의 금과 관련한 기록을 문헌을 통해 밝혔다.
또 우리나라 금 사용의 역사는 고대부터라며 “고구려의 귀걸이(가야계 형식의 細環耳飾, 신라계의 太環式을 들 수 있고, 백제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관제, 태환 이식, 뒤꽂이, 목걸이, 팔찌, 곡옥장식과 의복이나 목관의 장식금구)과 수촌리 출토 금제 유물을 들 수 있다”면서 “신라는 △보관, 관식, 세환이식, 과대, 요패, 팔찌, 반지 등 각종 장신금구와 △기명, 구슬, 방울, 보검, 금사(金絲), 불교 공예품과 △금을 이용한 세공기법이 고루 적용됐다. 고려는 △장야서(掌冶署 금, 은 세공품을 만들기 위한 관서) △채굴기록-충렬왕 3년(1276), ‘최석’이 인부 11,446명으로 홍천, 직산, 정선에서 70일 동안 금 7냥을 채취한 기록이 있고 조선에서는 △15세기의 금광업은 부역에 의한 관영형태로 운영되었고 △19세기 초의 금광업은 민간자본가와 농민이 영리와 생계를 위한 영업이었으며 근대에는 △외국인에게 고아산채굴권을 허용, 금 광산 개발이 이루어졌고 △1906년에는 ‘광업법’, ‘사광채취법’이 최초의 광업제도가 탄생되었다”고 설명했다.

제8회 공주학포럼 특강 전경

▲ 제8회 공주학포럼 특강 전경


우리나라 사금광상 밀집지역으로는 중부권으로 부여, 청주, 논산, 공주지구 사금광이 발달했다. 1911년 충청남도에서 발간한 ‘조선고아산지’의 기록에 의하면 천안 목천, 아산, 예산, 청양, 전의, 익산 지역과 공주의 우정(우성면의 전 행정명), 곡화천(현 탄천), 남부(우금티), 목동, 의랑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우성면의 ‘구리내’마을 지명은 금, 은, 구리가 많이 채굴되어 ‘구리나는 마을’이 ‘구리내’로 변천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최석원 전 총장은 “문헌 기록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백제 때는 충청지역이 금 생산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사금으로 생산된 금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무령왕릉 출토 금제품은 백제권역에서 생산된 사금을 이용하여 제작된 석으로 사료된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특강 전 윤용혁 공주학연구원장은 공주학연구원에 도서를 기증한 이해준 교수에게 감사장 수여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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