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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1400년전 백제 금동관모와 사리기 복원 완료

망실됐던 당시 유물을 생생하게 재현했으니 부여로 가서 그때의 숨결을 느껴보기

2014.10.01(수) 02:36:51 | 오수금 (이메일주소:sjhdk334@hanmail.net
               	sjhdk33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지난 9월14일, 아주 의미있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충남지역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관모(金銅冠帽)와 사비백제기의 부여와 전북 익산지역 절터에서 출토된 사리기(舍利器)가 부활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여 백제문화단지 역사문화관에서 전시해 일반에 공개한다고 보도되었다.
 
아니 이게 웬일?
백제문화는 충청남도 공주와 부여만 있는것인줄 알았는데 전북 익산은 뭐고 전국각지는 또 뭐지? 약간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백제문화라고 하면 그 권역을 공주와 부여만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의 융성했던 시기와 그 당시의 엄청난 유물 발굴 덕분에 공주 부여로만 오해를 할 수는 있겠으나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차원에서 확실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백제문화권은 공주 부여 외에 서울 경기 일원과 전남북 일원까지 크고 넓게 형성돼 있었다는 것을 알아두자.

특히 백제문화는 가까운 일본의 문화에 미친 영향도 상당히 크기 때문에 일본문화도 함께 연구하고 비교하는게 무척 중요하다고 할수 있다.
 

백제문화단지

▲ 부여 백제문화단지 정문격인 정양문


백제

▲ 백제역사문화관에 학생들이 많이 관람을 왔었다.


주말에 도민리포터가 부여에 다녀왔다.
부여에는 백제문화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수 있도록 당시 사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백제문화단지가 있는데 그 안에 백제역사문화관이 있다.
백제문화역사관에는 현재 이번에 복원된 금동관모와 사리기를 전시하고 있다.
 
실물 문화재가 아닌 복원된 것이 뭐가 중요할까?
 
당연히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면 땅속에 매장돼 있던 모든 문화재는 대부분 14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상당히 망실이 돼 있다. 그래서 원형이 훼손되어 그 당시 어떤 모양인지 일반인들은 잘 알수가 없다.
이렇게 원형이 훼손된 문화재를 여러 자료와 당시 벽화, 생활상, 사찰의 탱화 등을 참고해 원형으로 복원해 놓음으로써 1400년전 백제시대 왕관 등의 실제 모양을 오늘날의 후손인 우리가 제대로 볼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실 내부

▲ 전시실 내부 
 

복원돼서 전시중인 금동관모

▲ 복원돼서 전시중인 금동관모


이번에 복원 전시중인 유물들은 학계의 고증과 국내 최고 금속 복원 전문가의 손길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 중 금동관모는 백제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설명하는 지방권력의 위세품으로, 지역 최고 권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주로 출토된 것들이다.


고흥 길두리금동관모 발견당시 모습

▲ 고흥 길두리금동관모 발견당시 모습
 

고흥 길두리금동관모의 복원 모습

▲ 고흥 길두리금동관모의 복원 모습


공주 수촌리금동관모의 발굴당시 모습

▲ 공주 수촌리금동관모의 발굴당시 모습
 


공주 수촌리금동관모의 복원 모습

▲ 공주 수촌리금동관모의 복원 모습


나주 신촌리금동관모의 발굴당시 모습

▲ 나주 신촌리금동관모의 발굴당시 모습


나주 신촌리금동관모의 복원 모습

▲ 나주 신촌리금동관모의 복원 모습


서산 부장리금동관모의 발굴당시 모습

▲ 서산 부장리금동관모의 발굴당시 모습


서산 부장리금동관모의 복원 모습

▲ 서산 부장리금동관모의 복원 모습


익산 임정리금동관모의 발굴당시 모습

▲ 익산 임정리금동관모의 발굴당시 모습


익산 임정리금동관모의 복원모습

▲ 익산 임정리금동관모의 복원모습


진파리금동장식의 발굴당시 모습

▲ 진파리금동장식의 발굴당시 모습


진파리금동장식의 복원모습

▲ 진파리금동장식의 복원모습


일본 구마모또 금관장식의 발굴당시 모습

▲ 일본 구마모또 금관장식의 발굴당시 모습
 

일본 구마모또 금관장식의 복원 모습

▲ 일본 구마모또 금관장식의 복원 모습


백제 권역의 고분 중 공주 수촌리와 서산 부장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이렇게 5곳에서 출토된 금동관모가 복원돼 있고, 백제의 금동관모 외에도 북한 국보인 평양 진파리 출토 금동장식(고구려)과 경주 금관총 출토 관모 관식(신라), 일본 구마모토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 관모까지 복원 전시해 고대 삼국과 왜의 문화를 한 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사리기는 사리를 넣어둔 용기로 대부분 탑 또는 탑지의 맨 아래 기단부에서 출토되는데, 이번 복원 전시되는 사리기는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 사리기와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기, 사리 봉안기, 왕궁리 5층 석탑 출토 사리기들이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발굴직후 모습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복원후 모습

▲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복원후 모습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는 1400년전에 발굴됐다.
당시 사리함에서는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 기록이 발견됐고, 사리기의 봉안수법과 목탑 심초부(탑을 지탱하는 중심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돼 역사학자들을 흥분시켰다고 한다.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

▲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


함께 발견된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정유년 2월 십오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이 기록을 통해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 태자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이로써 백제사 편년과 동시기 고고학적 자료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가 마련됐을 뿐 아니라 위덕왕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가 확보됐다.

같이 발견된 귀금속과 장신구

▲ 같이 발견된 귀금속과 장신구


사리구 외에도 백제시대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금속과 장신구 등 다량의 진단구(鎭壇具. 탑이나 집을 지을때 붕괴나 액을 피하려고 묻었던 그릇이나 장신구)가 나왔다고 한다.

백제는 위덕왕때에 일본에 사리와 함께 승려와 장인(匠人)을 파견하면서 불교문화의 일본 전파에 주된 역할을 했기에 금동관모와 사리기는 백제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계, 문화 예술의 우수성, 그리고 국제성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시간 나는대로, 혹은 우리 백제문화를 제대로 한번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부여 백제문화단지로 달려가 그때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당시의 예술적 감각을 직접 한번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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