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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보다 의미있는 용산을 주목하라

추사연구가 박철상씨 “이곳은 추사의 안식처… 곳곳 흔적”

2014.09.01(월) 14:11:30 | 무한정보신문 (이메일주소:jsa7@yesm.kr
               	jsa7@yes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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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상씨가 “용산에 있는 세개의 암각문(사진)은 추사가 ‘옹방강 추모의 땅’을 구현하려 했던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추사고택보다 오히려 용산(오석산)이 더 의미있는 공간이다. 고택과 함께 용산의 추사유적지들을 묶어야 비로소 추사의 향리로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추사 연구가 박철상씨가 8월 23일 추사고택(예산군 신암면)에서 열린 기호인문마당 특강에서 용산에 있는 추사 흔적들의 가치를 거듭 강조해 관심을 모았다.

박씨는 “추사고택의 경우 추사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이곳 신암에 기반하고 있음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용산 곳곳에 남아있는 추사의 암각글씨 등이 그가 이곳에 둔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추사가 스승 옹방강 추모의 땅을 이곳에 구현하려 했던 증거로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시경(詩境)’‘소봉래(小蓬萊)’암각글씨와 화암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현재 수덕사에 보관)’ ‘시경루(詩境樓)’현판을 들었다. 즉, 옹방강이 그의 스승 소동파를 평생 따르기 위해 조성한 장치들을 추사 역시 용산에서 스승 옹방강을 대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것.

또한 추사가 유배를 앞두고 이곳 향리에 들르고, 유배지인 제주에서 화암사 상량문과 ‘무량수각’‘시경루’ 현판글씨를 써보냈으며, 끝내 예산에 묻힌 것을 볼 때 결국 영원한 안식처를 이곳 향리로 삼았다는 얘기라고 덧붙였다. 추사는 회갑때에는 집안 원찰이었던 화암사를 중건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추사고택은 선생의 서고역할을 했던 곳이며, 제주에서 보낸 서찰 역시 반드시 예산을 거쳐 서울로 가는 경로를 택했다는 점들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예산이 추사의 고장이라면, 추사고택에 국한하지 말고, 용산을 중심으로 추사가 구현하려 했던 이야기를 엮어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그동안 예산군지역 향토사가와 추사관련 연구자들도 꾸준히 제기해왔고 <무한정보>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지적된 내용으로, 군 행정의 적극적인 검토와 수용이 요구되고 있다. 현재 용산의 추사유적지들은 고택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연계성 있는 안내가 크게 미흡한 상태다.

한편 박씨는 신암지역 곳곳에 걸린 제2서해안고속도로 관련 펼침막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현수막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화암사 주변은 추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인데, 고속도로가 용산을 지난다니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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